논어 이인 12 방어리이행, 다원
휴, 여름의 태양이 점점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잠시라도 밖에 있는 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한낮의 오후, 심부름 때문에 애써 부모님 댁을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 문득 부모님 댁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작열하는 거리에 서서 잠시 망설였습니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면 핸드폰을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집으로 향합니다. 잠시라도 태양 아래 서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조금 쉬다가 부모님 댁에 다시 가볼 요량이었으나, 막상 집에 오니 더욱더 나가기 싫습니다. 문득 저보다 퇴근이 늦은 남편이 생각났습니다. 퇴근하는 길에 남편이 핸드폰을 가져올 수 있다면! 시간을 보니 마침 남편이 퇴근할 때 즈음이라,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퇴근길에 제 핸드폰 좀 가지고 와주세요!'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묘안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려니 남편이 들어옵니다. 저는 서둘러 현관 앞으로 뛰어나가 반갑게 남편을 맞이했지요.
"어서 오세요! 내 핸드폰은요?"
그런데 남편은 멀뚱멀뚱 저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입니다. 문득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메시지 보냈었는데, 친정집에 두고 온 핸드폰 좀 가져다 달라고요. 안 봤어요?"
"응? 메시지? 나 못 봤는데, 아마 운전 중이라 그랬나 봐요."
'아니! 내가 보내 놓은 메시지도 보지 않다니! '
갑자기 서운함이 몰려옵니다. 내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화도 납니다. 밖에 또 나가봐야 하다니 그것도 귀찮고 싫습니다. 아! 남편이 핸드폰만 제대로 가져왔다면! 갑자기 남편이 원망스러워집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남편 때문인 것만 같습니다. 팩 토라져서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미안해, 다시 나가서 가지고 올게!"
남편이 사과를 하며 다시 현관으로 나가려는 찰나,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핸드폰을 부모님 댁에 두고 온 것은 나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남편이 내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걸까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 순간, 내 마음이 내게 경고를 합니다.
'너,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해!'
이렇게 사소한 일로 원망(怨望)이라는 감정이 나를 찾아왔던 날, 다행히도 나는 마음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나면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내 만류에도 나갔다 온다고 문을 나서려 합니다.
"아냐! 이따가 내가 가지러 갈게. 안전 운전이 먼저잖아. 못 볼 수도 있지. 들어오세요. 우리 저녁 먹어요."
저는 그런 남편에게 미안해졌습니다.
원망(怨望), 얼핏 들으면 매우 거창하게 들리는 이 단어를 한 번 관찰해 볼까 합니다. '원망(怨望)'은 '원망할(원)'과 '바랄(망)'이 결합한 단어입니다. '바라다'라는 한자가 들어있어서 일까요? '미움'보다는 더욱 적극적인 의미가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남이 나의 바람대로 해주지 않을 때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 우리는 여기에 '원망'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원망은 일상에서 쉬이 쓰지 않는 말입니다. 소설이나 신문 지면에서 종종 만나기는 하지만요. 그리하여 저 스스로도 '원망'이라는 단어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핸드폰 사건이 있던 그날, 저는 알았습니다. 내 안에는 하루에도 무수한 '원망'이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대상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닐 뿐이지요.
'엄마 아빠가 부자였다면 나도 좀 편하게 살았겠지?'
'우리 팀 상사가 좀 더 잘하면 내 직장 업무도 편해질 텐데.'
'남편이 나 대신 핸드폰을 가져왔다면 얼마나 편할까!'
'아, 내 운명은 왜 이런담! 내가 좀 쉽게 살 수 있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린 시절 부모님을 향한 원망부터 주변 가족들은 물론 내 운명에 이르기까지. 생각해 보면 내 원망의 대상은 너무나 많고 많습니다. 게다가 원망의 순간들 또 얼마나 많은지요. 이렇게 원망이란 항상 내 마음속에 존재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원망의 원인은 외부에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주변 환경이 받쳐 주면 원망할 일이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핸드폰 사건을 계기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원망의 원인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이익만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자왈 "방어리이행, 다원."
논어 이인 12장
공자는 논어에서 '이익을 따라서 행동하다 보면 원망이 많다'라고 하였습니다. '원망이 많다'라는 말은 '남에게 원망을 산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핸드폰 사건이 있는 날,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공자 선생님이 '원망이 많다'라고 했던 것은 다른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기심(利己心)'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결국 타인이 아닌, 스스로의 마음에도 '원망'이 많아집니다. 마치 저와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남이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는 생각, 이 모든 것은 다 나만 편하자는 '이기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그 이기심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방식이 잘못되었기에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 결과 '내 안에' 원망이 쌓이고 내가 남을 원망하다 보니, 또 '남에게' 원망을 사게 됩니다. 원망의 악순환은 결국 내 안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의 원인은 똑바로 바라보면, 그 안에 바로 나의 이기심이 있습니다.
수 십 년 전, 한문 공부를 할 때 만난 한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엄격하셔서 논어의 가르침을 실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이것 좀 사다 줘(올 때 메로나)."
"이쪽으로 오는 김에 텔레비전 리모컨 좀 가져다줘."
내가 가족들에게 너무나 쉽게 하는 이런 말들을, 선생님께서는 저어하셨습니다. 일상에서 이런 부탁들을 쉽게 내뱉지 말라고 당부하셨지요. 이것은 남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원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 말씀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단 한 번도 아랫사람이라고 쉽게 심부름을 시키거나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공부, 공부만 시켜주셨지요.
그때에는 선생님의 모습이 심한 결벽증상과 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인간미가 없어 보이기도 했고요. 나는 선생님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신가 보다 하여 서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가르침을 주셨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나만 편하고자 하는 이기심을 억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남을 존중하는 마음을 실천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하면 결국 나 또한 내 곁의 사람들에게 예의를 넘어 행동하지 않게 되어 나를 비롯한 모두가 '원망'이라는 부정적 감정에서 보호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은 가르침이,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 안에서 농익어 절로 열매를 맺는 날이 있습니다. 오늘도 그런 날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오래전 제게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이 그리운 날이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나의 허물을 감싸주던 남편에게도 감사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저는 남편과 함께 손을 잡고 산책 겸 부모님 댁에 들러 핸드폰을 찾아 나왔습니다. 날은 후텁지근했지만, 남편과 함께 하는 산책은 행복했습니다. 우리들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시장을 향해 갑니다. 걷는 동안 마음속으로나마 공자 선생님도, 수십 년 전 제게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도 초대해 봅니다. 오늘의 후식 떡볶이는, 그리움이라는 양념을 듬뿍 쳐서 두 스승님께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