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혁이 파이널까지 살아남았다. 잘만 하면 조성진에 이어 2회 연속 한국인 챔피언이 나올 것 같은 기대감도 품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시종일관 쇼팽다운 우아하고 격조높은 해석을 보여줘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던 김수연이 파이널 문턱에서 미끄러져버린 게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뒤로 하고 결선까지 살아남은 이혁을 응원한다.
그런데 이혁이 보여준 퍼포먼스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오직 쇼팽의 작품만을 연주하는 만큼, 쇼팽 콩쿠르에서 연주하는 작품들은 거기서 거기다. 예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여러 곡이 세트로 묶여있는,에튀드,녹턴,폴로네이즈,마주르카,발라드,왈츠 분야에서는 등장하는 곡은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혁은 3라운드에서 뜬금포로 돈 조반니 변주곡을 들고 나왔다.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연주한 것이다. 이 곡은 슈만이 "천재가 나타났다, 모두 모자를 벗어라"며 극찬 오도방정을 떨어댔던 일화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현재는 잘 연주되지는 않는다. 연주효과가 매우 좋은 테크닉이 대거 들어간 곡이지만 쇼팽 초기의 약간은 설익고 어설픈 맛도 있기 때문이다. 쇼팽이 슈만의 극찬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이혁은 이 곡을 과감히 들고나오면서 젊은 쇼팽의 패기를 강조했다.
사실 동네 콩쿠르나 쇼팽 콩쿠르 같은 메이저 콩쿨이나 심사위원들의 고충은 다르지 않다. 수십 명의 참가자들이 가지고 나오는 곡들은 대개는 어느 정도 예측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심사위원들은 같은 곡을 계속 들으며 평가를 해야 한다. 현타가 올 수 있다. 여기에 색다른 곡을 들고 나오면 심사위원들의 입장에서도 신선함이 느껴져 점수를 더 주거나, 최소한 실점은 하지 않는다. 내가 심사위원이었다면 나는 이혁보다는 김수연에게 더 좋은 점수를 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혁이 파이널에 간 것은 분명 돈 조반니 변주곡이 큰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선곡이 이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혁은 파이널 무대에서 대부분이 연주하는 협주곡 1번을 과감히 버리고 2번을 골랐다. 전례를 봤을 때 파이널 진출자들의 실력이 평균적으로 비슷한 경우 2번을 연주해서 재미를 본 경우가 많이 있고, 특히 포고렐리치가 논란끝에 광탈했던 1980년의 경우 당 타이 손이 2번을 연주하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번 쇼콩의 경우 지난대회 조성진처럼 압도적인 사기크랙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인 에바 게오르기안이 스케일이 크고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해석이 쇼팽답냐는 질문이 들어왔을 때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하기는 다소 어렵다. 패기에 비해 세기는 좀 설익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이혁이 파이널에서 2번을 골랐다는 것은 짭짤한 재미를 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메달권을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쇼콩의 특성상 특정 국가에 2회 연속으로 1등을 주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말이다. 더욱이 이혁은 아직 21살에 불과하기에 2년 뒤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있기에 쇼콩에서 메달권에 들면 학교차원에서 차콩에 내보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쇼콩에서 메달권을 기대하고, 차콩에서 1등을 해준다면 손열음도 아깝게 못이룬 차콩의 한을 대신 풀게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