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반복되는 무간지옥
"다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소리치고 싶지만 호흡할 틈도 없다. 움직일 수 없다. 세상이 멈춰버린 그 시간, 그 공간.
여기는 8시 30분 지옥철이다.
출입문이 열립니다.
여의도역 급행열차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타기 시작한다. 탈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그런데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다. 머리를 뽀글 볶은 아줌마가 선두에 선다. 아줌마는 무게 중심을 앞쪽으로 기울인다, 정확하게 60도로.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순남은 당황한다. 이러시면 안 되는데..
푸쉬푸쉬 베이비.
아줌마는 미식축구 태클을 하듯, 순남을 부드럽게 안듯이 민다. 포근하다. 엄마의 향기,라고 느끼기에 이곳은 너무 갑갑하다.
향기라고 느끼는 것도 잠시, 화가 치밀어 오른다. 화를 낼만한 이성적인 이유도 있다.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보장받을 수 있는 점유권을 유지한다는, 법리적인 이유도 분명히 있다.
있지만, 화내야 할 이유가 있지만, 참아준다.
무엇보다 짝사랑 그녀가 뽀글 머리 아줌마 뒤쪽에 있는데, 이대로는 도저히 자리가 없다. 뽀글 머리 아줌마가 푸쉬푸쉬 베이비를 더 힘껏 해줘야 한다.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순남은 뽀글 머리 아줌마와 혼연일체가 된다. 배를 집어넣고, 엉덩이를 뒤로 뺀다. 가까스로 그녀가 탔다.
다행이다. 그녀가 탈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만 그녀는 문 앞에서 짜부라질 것 같은 모양새다. 그녀 주위엔 냄새나는 남자들 뿐. 그녀를 구원해 줄 순은 아줌마의 품에 안겨 베이비 원모 타임이 되었다.
다행인 건, 그녀를 볼 수 있는 시야는 확보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녀를 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신에게도, 아줌마에게도. 이 지옥도 속에서 그녀는 천년만에 피어난 꽃. 더 정확히 말하면, 순남이 30년 만에 처음 만난 아름다운 여자다. 물론, 그녀는 순남을 모른다. 순남도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그러니까 쌤쌤이다. 상관없다. 그녀를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항상 8시 30분 지옥철. 그녀는 그 지옥철에서 피어난다. 한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동작역을 지나고 고속터미널역.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린다. 숨 쉴 공간이 생겼다. 아줌마의 품에서 벗어나 숨을 크게 들이쉴 찰나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또 우르르 들어온다.
그 바람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다. 핑. 퐁. 핑. 퐁. 탁구공처럼 튕겨나가, 정신 차려보니, 바로 눈앞에 그녀가 있다. 뒤에서 지나치게 미는 바람에 밀착되어 있다.
순남은 당황한다.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그녀인데, 코 끝에서 그녀의 향이 느껴진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보니, 괴로워 보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어떻게든 좀 더 편하게 해주고 싶다. 몸을 비틀고, 뒤튼다.
꺄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순남을 본다.
순남은 당황한다. 그녀의 눈빛에 분노가 담겨 있다.
어딜 만져요. 이 사람 변태예요.
아닌데. 닿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고 노력했는데,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는데,
그러니까 그녀에게 미움, 분노를 사고 싶지는 않았는데.
눈물이 핑 돈다. 손이 너무 커서 그래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손이 컸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스친 것뿐인데.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녀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순남에게 향한다.
지옥철. 사람들의 갑갑한 마음은 이제 풀 곳이 생겼다. 해방구가 생긴 분노는 하나의 표적을 향해 일제히 날아간다. 사람들의 소리가 뒤엉켜 날아든다.
야 이 새, 변, 넌, 죽, 끝났, 미친, 신고
변태로 오인받은 순남은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가깝다. 가깝기 때문에 분노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사랑도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