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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남 Aug 14. 2023

시원한 휴가 즐기기. 목젖까지 짜릿한 소환사의 협곡.

휴직자 순남이 노는 법 2


오빠, 올해는 어디 안 가?


아내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아내는 요새 내 눈치를 많이 본다. 괜한 말로 상처 줄까, 배려한다. 7,8월은 더운 여름이고, 휴가 시즌이다. 원래라면 어디라도 피서를 갔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가지 않기로 했다. 무급 휴직 중이고, 아내도 공부하느라, 일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현재 우리 부부는 수입이 없다.


올해는 어디 안 가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더워도 너무 덥다. 집에만 있기엔 너무 갑갑하다.


근처 카페 갈까?


우리는 늘 가던 대로, 오늘도 메가 커피로 간다. 그리고 난 늘 시키던 메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얼죽아. 나는 아메리카노의 화신. 얼어붙은 아메리카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부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소리 질러, 아아! 아아! 아! 아! 아! 아!


161번 손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흑임자 라떼 아이스 나왔습니다.


에어컨 바로 아래 자리는 가장 기피해야 하는 자리다. 너무 춥다. 그렇지 않아도, 카페는 기본적으로 춥다. 얼른 처먹고 나가라는 뜻이겠지만, 금방 나가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비어있는 구석자리로 간다. 에어컨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


커피를 츄릅, 빨대로 한 번 쭉 빨고, 아내와 소소한 얘기를 나눈다. 오늘 점심은 뭐 먹지? 글쎄. 오늘 저녁은 뭐 먹지? 글쎄. 내일 아침은 뭐 먹을까? 몰라. 내일 저녁은 오랜만에 삼겹살을 먹을까? 그래.


소소한 얘기를 다 나누면 각자만의 방식으로 휴가를 떠난다. 아내는 흑임자 라떼 아이스를 쪽쪽 빨면서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쓴다. 아니면, 드라마나 대본집을 본다.

나도 글을 쓴다, 조금. 조금 쓰다가, 이내 떠나야 할 곳으로 떠난다.


지친 사람들이여, 오라.
소외받은 사람들이여, 오라.
팍팍한 현실에서 답답한 사람들이여, 오라.
오라, 이곳으로.
소환사의 협곡.


  그곳의 이름은 소환사의 협곡. 영웅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영웅이 된다.  그곳은 사람도 붐비지 않고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바람도 시원하다.

Leag of Legend.  일명 롤(LOL)은 15년이 넘게 정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임이다.  5명이 한 팀이 되어 상대 팀 5명과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다. 경기는 소환사의 협곡이란 가사의 세계에서 벌어진다. 상대 진영에 있는 기지를 부수면 이기는 게임이다.

  5명은 각각 역할과 위치가 정해져 있다.

위치 상으로는 탑, 미드, 바텀 3개의 주요 거점이 있다. 탑과 미드에는 각 1명씩 위치하고, 바텀에는 원딜과 서폿 두 명이 함께 위치한다. 원딜이란 원거리 딜러의 줄임말로, 직접 맞대지 않고, 활이나 총으로 싸우는 캐릭터를 말한다.


  이 게임에서 나는 주로 서폿을 한다. 승률은 꽤 높다. 티어는 다이아몬드다. 티어는 승패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 것을 말한다. 아이언,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마스터, 그랜드마스터, 챌린저 순으로 이어진다. 다이아몬드면 못 하는 편은 아니다. 

  소환사의 협곡으로 떠나면, 가끔 아내는 눈치를 준다. 지웠다고 하지 않았어? 응, 지웠지. 그리고 다시 깔았지. 소환사의 협곡으로 가야 하거든. 영웅들이 나를 부르고 있거든. 그래. 재밌게 해. 아내는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회사 생활로 마음을 다쳤다고 생각하니까, 염려할 뿐, 제재하거나 잔소리를 하지는 않는다.

  이기거나 혹은 지거나,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시원한 에어컨과 쓸데없이 성실하고 진지하게 게임에 몰입하는 것. 이긴다고 인생에 아무런 해가 되지도 않고, 이득이 되지도 않는 점. 그래서 롤을 한다. 이롭지 않은 인간이 무해하게 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

  자본주의 기반의 세계에서 우리의 가치는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평가받는다. 평가는 수치화된다. 자본주의 체계에 이로울수록 높은 수치를 얻고, 해로울수록 낮은 수치를 받는다. 하지만 난 때로 스스로 회사에 이득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일을 하고 있고, 보탬이 되고 있지만, 스스로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나의 평가 점수는 자본주의에 따르면, 0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휴직을 하고 롤을 하는 시간이 늘었다. 여유 시간이 늘었기 때문이다. 롤을 하는 동안 한편으로는 스스로 상처받았던 자리가 메꿔지는 것을 느낀다. 나 자신을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롤을 하는 동안은 누구에게 이롭지 않아도, 적어도 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아이가 공깃돌을 던지고 구슬치기를 하듯, 별 의미 없는 놀이가 필요하다. 삶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중요하고 무거운 것들로만 채우면 삶은 너무 무거워져서, 가라앉는다.


알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깨닫는다.

강약중강약, 때때로 무해하면서 의미 없는 것들로 삶을 채울 필요가 있음을.

중요하지 않고 가벼운 것들도 같이 채워야,

적당히 뜰 수 있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도 메가커피에 휴가를 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태블릿이면 충분하다.


같이 고고?


#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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