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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남 Aug 26. 2023

라면이랑 헤어질 결심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면 이 영화에는 라면 PPL이 너무 많다


 1. 

 내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면, 이 영화에는 라면 PPL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메인 스폰서는 농심, 오뚜기, 때론 삼양, 팔도.

세상은 넓고 라면은 많다


 처음으로 라면을 맛본 것은 만 3세 때였다. 안성탕면 국물의 생각지 못한 매운맛에 놀라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 나이에 먹기엔 라면은 너무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맛이었을 것이다.


 내 인생의 행복한 표정을 짓는 씬 scene엔 라면이 꼭 등장한다. 남들 야자 할 때 몰래 숨어 먹은 컵라면, 군대 짬밥 안 될 때 추운 야영지에서 끓인 따뜻한 뽀글이(봉지에 끓인 물을 넣어 봉지째 끓여서 먹는 방식), 히말라야 ABC(히말라야 최고봉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줄임말)에서 얼음을 녹인 물로 끓인 신라면(놀랍게도 ABC에서 신라면을 판다), 그리고 친구들과 기분 좋게 술 먹고 들어가는 길에 동네 편의점에서 먹었던 해장 라면이라든가. 인생의 행복한 국엔 라이 있었다.


 편의상 컵라면을 먹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컵라면보다 봉지 라면이 좋다. 왜냐하면 봉지 라면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입맛에 맞춰 얼마든지 다양한 라면을 만들 수 있다. 간단하게 계란 라면, 남은 야채 등을 처리하는 건강 야채 라면을 먹을 수도 있다. 가끔은 기름지게 참치 라면을 먹을 수도 있고,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삼겹살 라면, 생일에 먹어도 좋은 미역 라면, 오징어나 새우를 넣어 해산물 라면을 만들 수도 있다. 아, 한국인이라면 빠질 수 없는 김치라면과 짜파게티에 계란과 치즈를 넣어 짜계치까지!

무엇과도 어울리는 마법의 음식, 이것이 전 세계가 주목하는 K-food, 라면 Ramen!


 이도 저도 콘셉트 잡기 귀찮다 싶으면, 사실 냉장고에 있는 건 뭐든 다 때려 넣어도 온갖 맛들이 입안에서 춤추는 잡탕 라면 Dancing Ramen 이 완성된다.


 끓인 라면은 무한한 Infinite 가능성이다. 그래서 컵라면보다 봉지 라면이 좋다. 게다가 밥 말아먹는 건 국룰. 너무 좋겠지?


2. 

 참 좋지만, 라면과 함께하는 인생에 필연적으로 함께 따라오는 게 있다. 비만의 주범이 되는 포화지방과 나트륨, 나쁜 콜레스테롤(LDL). 혈관을 좁게 만들어서 동맥 경화에 고혈압까지 걸릴 수 있…


그래서 (마침내) 102.5kg


 미지의 별에 도착했다. 한 번도 착륙한 적이 없었던 행성에 불시착했다. (이제 인생의 장르는 공상과학 영화) 그동안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었다. 라면 세 봉을 끓여 먹은 다음 날은 점심을 굶든지, 팔 굽혀 펴기를 한다든지, 온갖 대책을 간구했지만, 기어코 그 별에 도착하고 말았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간식처럼 라면을 먹었다. 두 개도 먹고 세 개도 먹었다. 정말 먹고 싶어서 먹을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속이 허전해서 먹었다. 밥은 밥 대로, 라면은 라면 대로 먹다 보니, 축적되는 살을 막을 순 없었다. 축적되는 스트레스도 막을 수 없었다.


 이제 두 자릿수가 될 때까지, 아니, 건강해질 때까지, 라면과 헤어질 결심이 필요하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라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쳐다보지 말자.

 내가 미지의 별에 도달한 가장 큰 이유는 라면 때문이다.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이니까, 사랑하지만, 지금은 잠시 헤어져야 한다.


3. 

 미지의 별에 불시착하고서 한 달이 지났다. 

 

(마침내) 97kg 달성


 5kg를 뺐다. 회사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줄고, 매일 석양을 보며 걷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달리고, 눈물 콧물 질질 짜며, 따릉이를 타고, 달리고, 또 달리고, 으아아아, (반은 신나서, 반은 답답해서) 소리 지르고, 한주에 두 번은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한 덕분에, 미지의 행성에서 탈출했다. 


 그렇다. 나는 담배도 끊은 남자다. 하루 한 갑 골초였지만, 담배도 끊었다. 살을 빼고, 건강해지는 것쯤이야, 라면을 참는 것쯤이야 별 것도 아니다. 좀 더 건강해지고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거리를 둘 것이다. 이대로 쭉, 해피엔딩. 하면 좋겠지만,


 사실, 이 글을 쓰는 기준으로 어제, 밤에 몰래 라면 두 봉을 먹었다.

 아무도 모르게, 제일 약한 불로, 보글, 소리도 거의 안 나게, 보글. 

 아내의 잠이 깰까, 손목 스냅을 이용해 부드럽게 파와 청양고추를 자른다, 통,토동.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 이탈한 줄 알았던 별에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장르는 미스터리물로) 또 다른 미지의 별 100kg에 와 있었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한 달간의 노력은 두 봉의 라면에 붕괴되었다. 붕괴되었지만, 어제 먹은 라면 그릇을 설거지하며, 되새김질해 본다. (소처럼) 괜찮다. 맛있었으니까. 인생은 원래 미지의 별에도 가고, 신라면 같이 매운 별에도 가고, 진라면 같이 맛있는 별에도 가고, 안성탕면같이 순한 별에도 가고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이 글을 쓰며 또 하고 있다. 헤어질 결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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