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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서가 Oct 27. 2022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나아왔는가

리베카 솔닛의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을 읽고


"이 책은 내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입니다."


저술가, 비평가, 역사가,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의 회고록을 읽어보았다. <멀고도 가까운>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이 책이 내가 읽어보는 저자의 첫 책이다. 누구보다도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도 한때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고 억압과 폭력이 일상이었던 시간, 저자의 말마따나 비존재로서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이 책은 그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불편했다. 책 내용이 그렇다기보다는 '페미니즘 책'이라는 것을 볼 때 늘 느끼는 감정이다. 솔직히 나는 어떤 책을 '페미니즘 책'이라고 특정 지어 단정하는 것부터가 불편하다. 마음을 열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을 차단하는 역효과가 분명 있다고 생각해서다. 아무리 시대나 환경이 달라도 여자로서 살아가면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있음에도 이 책을 읽고 불편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되니까 편하지 못한 거다.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여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선대의 많은 여성들을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식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소음들은 당연히 불편하지만 변화에 있어 이런 문제들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젠더에 대한 의식이 양 극단을 오가고, 심지어 '젠더 갈라치기'를 이용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어떤 것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는 책에 대해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예민하게 날을 세우며 읽을 수밖에 없다.


현대의 페미니즘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작가의 회고록은 폭력이 가득한 일상에서 그녀가 어떤 일들을 겪었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어떤 요령을 습득했으며 어떻게 책으로 도피했고 또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가로 진행된다. 말 그대로 그 시절을 회상하는데 지나지 않아 이 책을 다 읽고서 어떨지 알 수 없었다.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사실 그녀는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나아왔는지 재어보기 위해서 과거를 재방문하는 시도를 한 것이었다. 나 역시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쓰고 싶지도 않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니 얼마나 달라졌는지. 페미니즘은 올바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분란만 조장하는 것인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많은 생각과 고민들로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옳을 것이다. 회고록은 조금 씁쓸했다.(줄 친 곳은 너무 많지만) 지금의 그녀도 과거에는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 백인이라는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후기가 무척 좋았다. 그래서 다른 책이 궁금하다.



때로는 명료하기 위해서 복잡성이 필요하다. 나는 때로 더는 줄일 수 없는 표현이 있다고 믿고, 어떤 심상을 일으키거나 환기하는 언어가 있다고 믿는다. 쭉 뻗은 고속도로 같은 문장보다 고불고불 오솔길 같은 문장이 좋다. 이따금 경치를 감상하려고 둘러 가거나 잠시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는 길 같은 문장이 좋다. │p.158


우리는 자신을 해친 무언가를 향해 다가가기도 하고, 그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그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다른 어떤 것 혹은 사람이 우리를 그것으로 도로 데려간다.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때 디뎠던 계단이 문득 폭포로 바뀐 것 같은 그런 시간의 미끄러짐은 본디 트라우마란 것이, 그리고 트라우마가 느끼는 시간이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한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나아왔는지 재어보기 위해서 과거를 재방문할 때도 있다. 닫힌 것이 다시 열린다. 가끔은 우리가 그것을 새로이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새로이 수선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다시 열린다. │p.299 후기 : 생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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