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다 멜초르의 <태풍의 계절>을 읽고.
Temporada de huracanes
연초부터 새로운 작가를 만나 도전적인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찬 현대 멕시코의 일그러진 모습을 소설로 기록한 <태풍의 계절>에서 우리는 조금의 아름다움도 기대할 수 없다. 분노에 찬 욕설이 난무하고 가난과 폭력, 마약, 강간, 매춘, 혐오가 가득한 이 작은 책에서 나는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다시 한번 강력하게 말하지만 문학적인 은유나 아름다움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베라크루스의 한 마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다소 환상적인 표현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다 어느 순간 마녀가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마녀와 관계했던 중심인물 루이스미의 주변 인물들 예세니아(루이스미의 사촌), 문라(루이스미의 양아버지), 노르마(루이스미가 데려온 소녀), 브란도(루이스미의 동네 패거리 중 하나)가 각 챕터를 할당받아 이야기가 진행된다. 챕터는 나누어져 있지만, 문단은 전혀 나누어지지 않아 한번 시작하면 챕터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 눈을 뗄 수 없다. 읽다 보면 과연 누가 마녀를 살해했고 그들에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추리 소설의 형식이긴 해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각 챕터를 이루는 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그 자체로 몰입도 높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데 그들이 처한 각자의 상황으로 우리는 베라크루스라는 희망이라고는 없는 곳, 더 나아가 멕시코가 안고 있는 어둠을 함께 경험해 보게 된다. 그러니까 인상을 마구 구기며 외면하고 싶고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 버리고 싶어지는 이 실재하는 절망을 느껴보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선택한 방식은 전혀 다정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시작하게 된 이 이야기는 르포르타주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작가였기에 문학적으로 순화하기보다는 오히려 폭발적으로 폭력적인 방식을 취해 독자가 훨씬 더 상황을 비관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 에너지가 너무 강렬해서 덮어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이내 알게 된다. 이렇게도 외면하고 싶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실제 그들의 절망이구나, 현실이구나. 책의 끝부분에서 작가가 하비에르 두아르테 데 오초아 정권 시절에 살해된 언론인을 언급하고 있어 이것은 이 책의 배경과 연관 있겠다 싶어서 검색을 좀 해봤다. 일단 각종 부패로 악명 높았던 하비에르 두아르테 정권 시절 멕시코에서 많은 수의 저널리스트들이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되고 실종되었다고 한다. 당시 멕시코를 저널리즘을 실천하기에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로 선정했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경찰의 부패와 고문, 무더기로 살해된 유해의 매장지가 발견되었던 일들도 있었다고 한다. 책 후반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조금 있다.
누군가는 너무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라 문학으로 볼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보다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모르는 이 세상 곳곳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 또한 좋아한다. 너무 솔직해서 또는 그 현실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것을 소설이라는 장치로 기록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를 응원하고 싶다. 실제로 문단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고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빈곤 포르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실제 베라크루스에 살았던 독자는 소설 속의 폭력은 전혀 과장돼 있지 않다고 했다. 글쎄, 적어도 나는 어딘가에서 실재하는 현실을 너무 불편하고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빈곤 포르노'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이야기의 문학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것도 글쎄, 그건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의미도 생기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의도보다는 독자가 스스로 찾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읽는 동안 나 역시 인상을 찌푸리며 읽었지만 멕시코에 대해 알아보며 결국은 좋은 경험이 되었음을 느낀다. 작가의 새로운 책이 나온다면 또 읽어볼 것이다. 을유의 암실문고 시리즈는 서로 다른 색깔의 어둠을 하나씩 담아 서가에 꽂아 두는 작업이라는데 이 주제, 너무 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