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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홍 Jan 09. 2023

천장에서 물이 샌다. 하필 여행 출발하는 날

오키나와 여행기 1

2022년 12월 31일 새벽 6시 30분.

한해의 마지막날, 여행 출발을 앞둔 우리 부부를 깨운 건 다름 아닌 경비 아저씨의 안내방송이었다.


"관리사무소입니다. 간밤 한파로 소화전이 터져 현재 물이 나오지 않고 있사오니, 각 세대는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게 꿈인가? 소화전이 터지다니. 그게 뭔데? 아파트에 전체 방송 기능이 있는지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 와중에 거실에선 무언가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이게 무슨 소리야? 어디서 물이 새나 봐."


화들짝 놀라 거실로 나가보니 천장에서 한두 방울 떨어진 물로 바닥이 흥건했다. 급한 대로 주방에 있던 양동이를 받쳐놨다. 소리가 '톡톡'에서 '툭툭'으로 더 커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변 벽지 곳곳에 물에 젖어 누래져 있었다. 천장 말고 다른 곳에서도 물이 스며들어 나오던 터였다. 애지중지 열심히 꾸며놓고 나름 만족하며 살던 우리의 신혼집이.. 한순간에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처럼 느껴져 버렸다.


"복도도 완전 다 물바다네."


문을 열어 보니, 물은 집 밖에도 철철 흘러넘쳤다. 평소에 매일 봤던 문 왼편에 위치한 1m 크기의 회색 네모박스. 그게 바로 소화전이자 이번 사태의 주인공이었다. 불이 나면 끌 수 있도록 저장해놓은 소방용수함.


결혼과 동시에 처음 독립한 지 이제 겨우 3개월 차.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다름 아닌 엄마아빠였다.


전화로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보니, 관리사무소에 연락해서 우리 집 현재 상황을 알리라고 했다. 에이 그 정돈 내가 이미 알아서 했지, 어른들도 참 별거 없구먼.


나이를 30 넘게 먹어 놓고 막상 위급상황이 닥치니 한다는 게 엄마아빠한테 전화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나 자신이 아직 애기 같아 웃음이 나왔다.


밖에서 집 현관으로 물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도록 걸레를 받쳐놓고, 물 새는 부분을 추가로 확인했다. 그러고 나니 현 상황에서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규칙적으로 똑똑, 양동이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비행시간을 맞추려면 출발시간까지 남은 건 앞으로 3시간. 성공적인 여행 첫날을 위해서는 컨디션 관리가 가장 시급한 일처럼 느껴졌다.


"오빠 나 두 시간만 더 잘게."

"지금? 아직 물이 계속 떨어지는데? 짐도 다 안 싸지 않았어?"

"두 시간 더 자고 딱 일어나서 쌀게."


나중에 오빠는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상황보다, 그 상황에서 더 자겠다고 하는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그래, 오빠가 결혼한 여자 클라스가 이 정도다.


솔직히 나 애기 맞는 것 같다. 잠 많은 애기.





'두 번째 신혼여행'이라고 이름 붙인 여행을 떠나는 길. 우리는 마치 피난길에 오른 난민들 같았다.


물은 아예 안 나와서 샤워는커녕 물티슈로 눈곱만 겨우 뗐다. 게다가 물이 곳곳으로 퍼지면서 엘리베이터도 멈췄다. 우리는 18층 꼭대기에 산다.


그렇다, 오빠는 캐리어 2개를 양손으로 들고 계단을 내려와야 했다ㅋ


내가 하나를 들어준다고 해도 굳이 자기가 2개를 다 들겠다고 하더라. 한 7층쯤 와서였을까? 낮게 읊조리는 욕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그냥 못 들은 척해줬다. 얘는 4박 5일에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쌌나. 날 향한 욕이 좀 포함된 건 아닌가 찔렸던 것도 맞다.


쌩쌩 부는 찬바람에 거지꼴로 캐리어를 끌며 길을 걷노라니, 괜히 무리해서 여행 가자고 했나 잠깐 후회가 들었다. 집을 오래 비우는 게 처음이라 걱정도 됐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천장에서 물이 새요'를 검색해봤다. 연관 검색어로 '천장에서 물 새는 꿈'이 나오더라.


소망하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사업운이 좋아져 재물을 얻게 되는 길몽

하는 일이 막힘없이 순조롭게 잘되는 길몽

좋은 소식에 행운이나 뜻밖에 재물이 들어오는 길몽


놀랍게도 해석은 다 좋은 이야기들이었다.


"새해에는 좋은 일이 많이 있으려나 봐"


서로의 더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같이 키득거렸다. 우리의 경우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빠와 함께라면 천장에서 물이 새든, 바닥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다짐했다. 앞으로 우리 인생에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함께 견뎌내자고. 내가 비록 잠깐은 잠들더라도 곧 일어날 테니 같이 문제를 고민해보자고.


아침에 못 감은 머리가 간지러웠다.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여행의 출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려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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