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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홍 Jan 09. 2023

100만 원짜리 최고급 료칸에 묵게 된 이유를 서술한다

오키나와 여행기 2


제주도 2/3 크기, 이 작은 섬의 첫인상은 예상보다 매섭게 뺨을 때리는 찬바람.


한국 강추위에 대한 반대급부로, 동남아급 따뜻한 날씨를 기대했는데. 오키나와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도로에 다니는 네모반듯한 '박스차'들도 인상 깊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한 세단처럼 트렁크가 길쭉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벽처럼 세로로 반듯하더라. 또 대부분 작고 귀여웠다.


연말연시라 렌터카 예약이 무척 어려웠다. 나는 겨우겨우 번역기를 돌려서 OTS라는 일본 현지업체 사이트에 몇 대 안 남은 차를 찾았다. 3박 4일에 39000엔, 가격은 좀 나갔지만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한국인 직원 한 분이 계셨는데, 일본의 좌측통행에 잔뜩 긴장해있던 우리의 폭풍 질문에 굉장히 친절하고 자세하게 답해주셨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신호등'이라고 적힌 교통법규 안내 스티커를 핸들 정중앙에 딱 붙여주신 것이 촌스럽지만 큰 도움이 됐다.


차 뒤쪽에는 일본어로 '외국인을 환영해 주세요'라고 적힌 (것으로 추정되는) 스티커를 달아 주셨다. 내가 영향력만 좀만 더 컸어도 '돈쭐' 내드리는 건데! 꼭 손님 많이 많이 받고 번창하세요.


왜 일본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데, 한국은 왼쪽에 있을까? 일본의 경우 과거 사무라이들이 다닐 때 왼쪽에 찬 칼자루가 부딪히면 싸움이 붙기 때문에 좌측통행을 시작했다는 글을 봤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나라는 미국 차가 들어오면서 왼쪽 운전석과 우측통행을 하게 된 것 같은데, 국민 대부분이 오른손잡이라는 점과 좌측통행의 사고 발생률을 생각하면 참 다행인 점 같다.


일본인들은 운전도 딱 그들답게 했다. 최고 속도가 겨우 60km, 조심조심. 그 흔한 클랙슨 소리 하나 없이 도로 전체가 조용했고 배려가 넘쳤다. 그래서 여행기간 내내 무탈하게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자꾸 깜빡이 대신 와이퍼를 켜는 것만 빼면 말이다. 비도 안 오는데!





https://www.hyakunagaran.com/


우리가 여행 첫날을 아주 멋진 숙소에서 보내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12월 31일부터 1월 4일. 일본인들 대부분이 연휴일 때 휴가를 간 탓에 숙소가 평상시에 비해 너무 비쌌다. 애초에 비싼 숙소면 몰라도 평소 10만 원인 숙소를 30만 원 주고 묵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와 연휴가 똑같이 비싼... 100만 원이 넘는 료칸 햐쿠나가란에 묵게  됐다. 마침 딱 한자리가 남아있길래 혹시 이건 운명인가 싶었다. 어떻게 좀 합리화가 됐으려나ㅎ



황송할만치 좋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한 건 비치된 남색 옷으로 갈아입고 옥상에 있는 온천을 찾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묵은때를 빼야 했다. 전날 아침 출근할 때 씻고 못 씻었으니 자그마치 35시간을 묵은 때였다.


이곳 료칸에는 총 6곳의 야외온천이 있었는데, 방에서 휴대폰 어플로 빈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찾은 비어있는 온천 이름은 '옌궁'. 하늘을 향한 구멍이라는 뜻이라나.


가슴 높이 정도되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는 독채 온천이 우리를 맞이했다.


와. 극도로 프라이빗하고 또 로맨틱했다.


뜨끈한 탕에 누워 올해의 마지막 해가 넘어가는 순간, 또 마지막 달이 뜨는 순간을 두 눈으로 기록했다. 구름이 껴서 분명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자체로 충분했다.


적당히 차가운 바람과 몸을 휘감는 따뜻한 온천물이 올 한 해 고생했다고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으니.



저녁은 오키나와식 코스요리였다. 숙박비에 저녁과 다음날 아침 식사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나름 합리적인 셈이라고 또 한 번 경제적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숙박의 이유를 찾았다.


식사는 자리 좌측 상단에 그날의 메뉴를 일본어로 적은 귀여운 '차림표'를 놓았을 때부터 짜릿했다. 한 자도 읽을 수 없는 까막눈이었지만 '간지'가 났기 때문에 만족했다.


사실 한국에서부터 오키나와 음식에 대한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다녀온 주변인들이 '오키나와는 다 좋은데 음식이 그닥이야'라는 후기를 전했기 때문이다. 이곳 료칸에서의 식사도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특히 회는 특유의 쫀득함이 없어 밍밍했다. 오키나와는 수온이 높기 때문에 생선회가 탱탱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 반대로 오키나와식 두부는 양념이 내 입맛에는 너무 짰다. 식사 초반에 나온 고구마와 생맥주가 제일 맛있었다.


이날 식사를 의미 있게 만들어준 건 음식이 아니라, 다름 아닌 '앞자리 손님'이었다.


"오빠 저기 여자 운다, 운다."


우리 자리 구조상 그들의 뒷모습을 안 볼 수가 없었는데, 남성 작고 네모난 박스를 꺼내자 여성은 무언가를 예감한 듯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 프러포즈였다.


3개월 차 결혼 선배로서 그들 커플 역사의 현장을 흐뭇한 미소로 직관하게 된 우리. 네모박스에서는 역시나 소중하게 반짝이는 반지가 나왔다. 먼저 남성이 여자에게, 그리고 여성이 남성에게 차례로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줬다.


마침 서빙된 우리의 디저트에는 'Happy Wedding'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예약할 때 신혼부부라고 적은 것 같기도 한데 어쩜 이런 세심한 배려를.. 완전 감동.


일본인 커플의 새로운 출발도, 우리가 부부로서 처음 맞이한 한 해의 출발도 무척이나 기대되는 반짝이는 저녁이었다.


아름다운 밤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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