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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잌쿤 Mar 05. 2022

채식주의자

한강 저

대선이나 총선 등 굵직한 선거가 있을 때마다 생각해보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청렴하고 유능한 후보가 나와도 100%의 지지를 받지는 못할 것이며, 반대로 아무리 형편없는 인물이 후보자에 이름을 올려도 지지율이 0%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당독재 체제인 중국에서도 공산당 지지율은 100%에 이르지 않으며, 브라질이나 멕시코에서는 정치에 반감을 가진 국민들이 고양이, 당나귀, 침팬지 후보에게 적지 않은 표를 던진 사례도 있다. 1938년 독일 국가의회 선거에서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은 99%의 득표율을 보였는데,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무시무시한 득표율보다 나머지 1%에 더욱 주목해볼 수 있다. 종교 이상의 광풍이 몰아쳤던 시기의 독일에서도 1%의 소수의견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의 범위를 확장시키면 모든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소수의견에 속하게 된다. 점점 복잡하고 많은 선택을 강요받는 현대 사회에서 주어지는 모든 안건에 대해 다수표를 던질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아주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누군가는 노동법에서, 누군가는 세금 제도에서, 누군가는 성범죄 처벌에서, 우리 각자는 모두 한 번쯤은 소수의 편에 서게 마련이다.


인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소수의견도 경청하도록 의식이 발전하면서 이제 우리 사회는 또 다른 성장통을 겪게 되었다.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은 목소리를 내는 행위에 '손쉽게'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면서 이제는 무엇이 소수인지 모를 만큼 저마다의 소리가 난립하고 있다. 과거 노동자의 권리나 민주주의와 같은 대의적인 가치에서나 주목받던 '소수의견'의 목소리는 이러한 난립 분위기를 등에 업고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누구는 속옷을 입지 않겠다고, 누구는 외모지상주의를 거부하겠다고, 누구는 육식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계속해서 '소수의견'을 주류로 끌어올린다.

집단주의와 개성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두 가지 속성이면서도 서로 모순된 개념이다. 집단 속에서 자라왔기에 공통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는 공유하지만, 모두가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성장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은 공통의 가치관 속에서도 모두 저마다의 개성을 형성하게 된다. 각자의 개성을 만들어내는 원천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무의식의 공간 속에 있고, 공통의 가치관에 적합하지 않은 모난 돌은 무의식 속으로 깊숙이 억압된다.




'채식주의자'는 어린 시절부터 깊은 곳에 자리했던 무의식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한 인물의 행동과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빌려, 점차 소수의견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사회 변화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대한 고찰을 요구한다. 다수가 순응하는 사회의 관습들,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여기며 지켜왔던 것들이 어딘가 이면에서는 소수자에게 무의식을 형성하고 때로는 인격과 가치관에 심각한 수준일지 모를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를 신고 그녀는 내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힘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인 영혜는 남편의 입을 빌려 '어느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특별하다는 말의 용법은 좋고 싫음의 판단이 없는, 보통과 구별되게 다르다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영혜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아주 보통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보통의 삶을 살아가던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꿈을 통해 잠재된 무의식을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무의식의 영역은 그저 무시하고 살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었고, 영혜는 여러 번의 꿈을 꾸면서 점점 무의식의 영역에 동화되고 순응한다.


'채식주의자'에서는 꿈을 통해 무의식이 발현되는 과정을, '몽고반점'에서는 무의식의 발현이 완성되어 완전히 사회성을 상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나무불꽃'에서 비로소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혜는 영혜를 이해할 수도, 이해 못 할 수도 없는 입장에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 끊임없는 갈등을 마주한다. 그리고 성장기에 있는 아들 지우의 꿈을 통해 또 다른 무의식의 형성을 마주하면서 소설은 끝맺음된다. 앞선 두 이야기의 화자인 남편과 형부는 무의식의 경계를 두고 정확히 대비되는 인물이다. 영혜를 극도로 기피했던 남편과 영혜에게 극도로 몰입했던 형부의 모습을 차례로 접한 뒤에, 독자는 인혜의 시각에서 나무 불꽃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는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인혜가 부모마저 저버린 동생을 끝까지 놓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같은 환경에서 자랐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인혜가 영혜의 무의식을 어렴풋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인혜도 무의식의 영역에서 끝없는 내적 갈등을 겪는 인간이었고, 사회에 순응하며 보통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연극이나 유령 같은' 고단한 삶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죽으면 왜 안되느냐고 묻는 영혜의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던 것도, 이미 인혜는 죽음의 얼굴을 혈육처럼 낯익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혜는 '그냥 죽어가고 있을 뿐인' 영혜를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결국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독자에게 선택을 떠넘긴다.




개를 때려서 잡는 비인간적인 짐승 학대도, 부모에 의한 강압과 체벌도 한때는 우리의 '관행'이었다. 그러한 관행이 누군가의 무의식에는 무시무시한 트라우마로 남는다. 지금은 두 가지 모두 다 관행이라는 이름에서 멀어졌고, 법적인 제재가 가해질 정도로 사람들의 의식이 변했다. 문제가 해결됐나?

아니다. 잡식성인 인간은 육식을 해야 하고, 조신한 여성은 브래지어를 갖춰 입어야 하고, 부부 사이에는 육체적인 관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의 '관행'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간주되었던 것들도 도전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 관행도 누군가에게는 부정적인 무의식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관행도 언젠가는 변해야 할 '악습'이 될까?

사회의 관습이 만들어낸 '괴물'들에 대해 사회가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관습이 대다수의 구성원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낸,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 논의를 더욱 어렵게 한다. 영혜는 악하게 살지 않는데도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정신병원에 격리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무의식은 강제로 통제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회적 혼란을 감수하고라도 방치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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