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머니께서
"고리 적에... "라는 말을 자주 쓰셨다.
옛날이려니 생각했다.
지금 역사 학자들도 고려를 고리로,
고구려를 고구리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사전에 '려麗' 자가 나라 이름 일 때는
'리'로 발음한다고 나온단다.
앞뒤로 아귀가 맞는 얘기이다.
고리족은 지금도 몽골 동부에 존재한다.
고리족이 나라 이름으로
고구리(고구려)나 고리(고려)가 되었고
코리아가 된 것이다.
중공 지린성 집안(集安) 산성하(山城下) 고분군(古墳群)
대륙의 신라는 큰 나라이니
캐피털이 여러 개였는데
그중 서경이 한반도의 경주였다.
경주에 고분이 많은 이유는
대륙보다 안전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리라.
고구리 입장에서
안전한 곳이라 여겨졌던 곳이
두만강 바로 위의 집안시와
평양 안악 지역이었나 보다.
고분의 도시들이기에.
그러한 안전 대책도
현대에 와서 중공에 의해 무참히 무너진다.
중공이 땜을 만들어 수몰시킨
적석총이 1만 5천 기에 이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시에 아직도 3,000기가 남아 있다.
수몰 안 된 적석총들이 관리가 안 되어
심각히 훼손되고 있는 상황인데
수장된 것이
오히려 보존에 유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훗날 물 빼고 복원하면 되니까.
그리고 고구리 고분의 위치가 주는 교훈은
또 하나 있다.
고구리 고분은
고구리 영역 안에서 축조된 무덤이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에
일본 역사 학자들을 기용해
조작된 신민사관을 만들어 낸다.
그 신민사관을 고구리 고분의 위치가 깨버린다.
바이칼 호 옆과 북경 서쪽 천진시에도
고구리 적석총이 있기 때문이다.
규모로 세계에서 제일 알려진 것은
이집트 피라미드들이다.
숫자로는 고구리 고분이 최다이다.
11세기 6000개의 불탑이 있었던
미얀마의 바간 지역은
현재 3,500개의 탑으로
세계문화유산에 한국의 서원과 함께
2019년에 등재되었다.
총 2만여 기 중 현존 3,000기의 고구리 고분?
이건 보통 유적이 아닌 것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건축적으로 접근해 보자.
경주 석굴암은 바위를 판 굴이 아니다.
석재로 석실을 건축하고 흙을 위에 덮은(봉토)
석실 봉토 건축물이다.
고구리 고분들도 후기에
그와 같은 방식의 구조물들이 많다.
다만 다른 점은
신라 석굴암은 내부 마감을 석재로
정밀히 조각해 덧대어 붙였고
고구리 고분은
벽화로 찬란하게 장식했다는 차이이다.
집안시(集安市) 태왕향, 태왕릉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돌무지무덤(적석총)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에 근거하여
태왕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호태왕은 광개토대왕만의 호칭이고
이 능에서 동북쪽으로 300m 거리에
광개토대왕비석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광개토대왕 고분임이 유력하다.
고구리 고분은
전기에는 적석총이 주로 축조되었고,
중기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혼재하다가
후기에는 봉토분이 주로 축조되었다.
봉토분 중에는
매장부인 석실에 벽화를 그린
석실벽화봉토분이 있다.
벽화는 적석총이든 봉토분이든
석실이 있어야 되는데
석실이 없는 것이 더 많고
있다해도 덮개돌판이 없는 것도 있다.
덮개돌판이 없는 석실적석총보다
도굴하기에는
덮개석이 있는 석실봉토분이 용이하다.
그래서
제대로 추조된 석실봉토분에선
매장물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벽화는 온전히 보존되었다.
장단점이 있는 것이다.
고구리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피라미드형 적석총 고분
정교히 다듬은 피라미드 옆으로
비스듬히 턱 하니 걸쳐진 자연석이 일품이다.
그 자연석은 12 간지를 의미하지만
건축공학적으로
피라미드의 하중에 의한 형태 훼손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5세기 초, 고분 구조는
입구의 무덤길, 앞방과 통로,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다.
이는 고구려 일반 귀족의 저택이
조선시대와 같이
사랑채와 안채로 나누어졌음을 알게 해 준다.
고대에는 지배자들이
현세에서의 신분과 지위를
내세에도 누리기 위해 순장(殉葬)을 지냈다.
그러나 죽은 이의 세계에서는
현세의 사람과 물건이 별 쓰임새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자
무덤 안에는 실물대신 모형(模型)이 묻히거나,
더 나아가 생전의 영광을 기리고,
누리고 싶은 내세의 삶을 형상화한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경우,
신라와 가야에서는 모형을 껴묻는 습속이
오랫동안 지속된 반면,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무덤 칸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행하였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고고학자 에두아르 샤반에 의해
학계에 처음 알려진 고구려 고분벽화는
이후 일본의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
독일의 미술사학자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등
고분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외국 학자들의 눈을 매료시켰다.
그들이 저술한 ‘조선미술사’에는
직접 그린 삽화와 함께
고구리 고분벽화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실렸고 실제로 봤을 때의
놀라움도 생생하게 적혔다.
그 이후로 한 세기가 지났고
고구리 고분벽화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아쉽게도 벽면에 그려진
사신도와 인물 풍속도에 비해
천장에 그려진 그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고구리 고분들이 북한과 중국 영토에 있어
직접 조사는 물론
사진기록물을 접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일제 때 촬영된 사진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사)해외한민족연구소 회원들이
사비를 각출해서 정부로부터 지원 없이
3만 장에 이르는 사진을 촬영하게 된다.
촬영 과정은
무슨 작전과도 같이 이루어진다.
집안시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비 오는 날 밤에
산소 용접기로 열쇠를 절단하고
고분에 조선일보 사진 기자를 투입해서
약 3만 컷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일제 때 찍은 사진이라고 홍보하며
'아! 고구려 전'을 조선일보에서 개최한다.
평안남도 용강군, 쌍영총(雙楹塚), 횡혈식석실분
인물풍속도와 사신도 관련 벽화무덤
집안 무용총의 천장벽화
평양 안악 지역, 강서중묘 앞방의 천장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