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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지 Jul 04. 2023

봄비

걱정과 불안의 굴레에 잠식당하지 않기

  통– 통– 토동

  늦은 밤 스테인리스 가스 연통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아, 비구나!

  퇴사 후 무기력해진 나는 되도록 바깥 외출을 하지 않는다.  워낙에 '집순이'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만나자"는 말을 할까 두려워 사전 차단하고 있다.  너무 갇혀(?) 있어서 자극이 필요했던 걸까? 포근한 기분에 베개에다 얼굴을  본다.


  핸드폰은 연일 건조한 날씨 탓에 산불 사고 소식을 들이민다.  거센 불길 앞에 소방 대원이 쏘는 물줄기가 미미하다.  뉴스 아래 덧붙여지는 익명의 걱정과 탓을 훑으며 마음이 아리고, 답답해졌다.  결국 재난을 헤쳐나가는 건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휑하다. (그래봤자 당장 베개에 누인 머리조차 뗄 생각을 않으면서…….) 됐어! 이제 그만.  얼른 자자.  꼬리를 무는 고민은 거기도, 여기도 도움을 못 준다.  이번 주간은 부활 주간이 의식하며, 할 것을 하자!  그냥, 내가 할 일을 하는 거야!

  5분 단위로 설정한 알람도 삭제.  한 번이면 충분하다. 못 미더운 마음을 전제하지 말기로 하자.




  부-욱 부-욱

  방울방울 맺힌 유리를 와이퍼가 손 유희처럼 쓰윽 밀어내며 여명을 돋운다.  촉촉한 새벽공기의 상쾌함을 마시며 도로로 차를 올렸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이 낡은 경승용차가 이리도 유용할 줄이야! 그렇지, 이 비는 부모님 기다리시던 비겠다.  오죽 가물었어야 말이지…….  잔잔히 내리는 이 봄비로 농사꾼의 마음도 해갈 됐겠다.  내가 한 일은 없지만 든든한 기분이 든다.

  오랜 장롱면허로 겁 내던 운전을 독려해 준 것은 동생들이었다.

'걷기 힘들어질 노년엔 무거운 짐도 버거울 테고, 병원이나 보고 싶은 친구를 찾아가는 것도 다 운전이 필수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도전하는 게 낫지 않겠냐'…….

  아주 다정하고도, 현실적이지 않은가? 아직 어스름기가 가시지 않은 물기 어린 도로를 밟으며, 라디오를 켰다.


“전국에서 일어난 대형 산불이 사흘 만에 반가운 봄비에 모두 진화되었습니다.”





_ 2023.4.11  지난 글을 다듬어 발행하였습니다.


[나에게 쓰는 후기]
•일상을 통해 스며들기 쉬운 것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흔한 것이 불안과 감사이다. 그런데 감사는 불안보다 그 입자가 작아서 많아도 눈에 띄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새삼스러운 시선'이 필요한 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마찬가지겠다.
※ 타인의 불행에 빗댄 감사나 자랑이 아니라, 자기 삶 속 너무나 당연히 생각한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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