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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Dec 12. 2024

먼저 손 내밀기 (도와달라고)

나는 그 누구보다 내 편이어야 한다.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대 사안인 만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석적인 방법 아닌가. 그런데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언니와 단 둘이 만남을 가질 생각을 하니 연락을 취하기 전부터 마음이 영 쑥스러웠다.


평소 지인들에게 안부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다. 먼저 하지 않기에, 당연히 나에게 안부 연락을 주는 이도 거의 없다. 남편은 나와 정반대다.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과는 꾸준히 연락을 이어간다. 카톡창에 누군가의 생일이 뜨면 전화를 걸고, 송년 인사 혹은 신년 인사를 하기 위해 먼저 연락을 한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를 걸 때도 있다. 자연히 남편에게도 지인들의 연락이 자주 오고, 그들은 끈끈한 네트워크를 이어나가며 정보를 교환하고 정을 나눈다. 남편의 그런 모습이 좋아 보여서 나도 따라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 힘들었다. 일단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일이 불편하다. 통화 중 화젯거리가 끊겨 침묵이 흐르면 초조해진다. 상대방이 내 눈빛이나 몸짓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하다. 그래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통화는 거의 하지 않는다. 문자메시지(카톡 포함)로 용건만 간단히 나눌 뿐이다. 아주 친밀한 몇 명과만 1년에 두세 번 정도의 직접 만남을 가지며 긴 이야기를 나누길 추구하다.


무엇을 추구하든, 이번엔 내가 먼저 언니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완전한 타인에게 지원서나 이력서를 제출해 본 적은 있지만 과거의 어느 시점 함께 했던 지인에게 오래간만에 연락을 하고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났다. 거절당하더라도 그 거절은 내 제안에 대한 거절이지,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이미 부정당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만약 거절 당하게 되면 그 극단 단원 모두가 나를 비웃을 것만 같은 망상에 시달렸다. 위축되고 겁먹은 초식 동물 마냥 웅크리고 있는 나 자신이 싫고 답답했다. 거절당한 후 어색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고, 조여드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좌절하고 있을 나의 모습이 자꾸만 그려졌다. 내가 원래 이렇게 겁 많고 비관적인 사람이었나. 용기가 바짝 솟아올랐다가 다시 화라락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마음을 달랬다. 스스로를 지금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규정짓지 말자. 나는 오래 쉬었다. 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대업을 이루었다. 오랜 기간 아픈 몸으로 살다가 이제 막 헤어 나온 참이다. 내 삶에 대해, 그리고 나의 시도와 제안에 대해 창피할 것도, 꿀릴 것도, 위축될 필요도 없다. 아니면 말라 그러지 뭐. 싫으면 관두라고 하지 뭐. 여기가 아니라면, 더 좋은 기회가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신은 종종 새로운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

용기와, 의연한 마음과, 담대함을 가지자. 나는 그 누구보다 내 편이어야 한다.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였다.


다행히 언니의 전화번호를 몰랐다. (야호!)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는 언니가 있었다. 말보다는 글이 편하다.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 안녕
요즘 뭐 해
나 언니 만나고 싶어.


(두근두근)



답이 왔다. 언니는 지난 몇 달간 쉼 없는 작업으로 완전히 지친 데다, 코로나까지 겹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작업을 둘러싼 일련의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타인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자제하는 중이라고 했다. (언니는 그냥, 굳이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나는 왠지 안심이 됐다. 만나는 것이 어렵다면 통화를 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코로나에 걸렸다면 통화도 힘든 상태이리라. 나는 최대한 정성껏 메시지를 작성하여 언니에게 보내기로 했다. 천천히 언어를 골라내고 글로서 진심을 전달하는 건 자신 있었다. 말을 하다 보면 중간에 길을 잃거나 뜻하지 않은 헛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특히 지금처럼 무언가를  해내고 싶을 땐 더더욱.


내가 언니에게 보냈던 메시지 전문은 이러하다.


나 언니네 극단에서 함께 하고 싶어서 연락해 보아.
거절당하면 몹시 아플 것 같아서 많이 고민했는데
그래도 고백하고 차이는 게
미련만 가지고 사는 것보다
덜 괴로우니까
이렇게 마음을 전해.

왜 하필 여당극인지 속속들이 다 여기에 전하긴 힘들겠지만,
연극을 다시 해야겠다고 맘먹고
작년부터 계속 공연들을 보러 다녔는데
언니의 작품들이 너무나 와닿았어.
일상에 변화를 줄 정도로.
작품 자체도 좋았지만
연습 과정 동안 수평적인 관계에서
서로 치열하게 협의하고 토론하고
다양한 시도가 있었겠구나, 가 보여서
부럽고 존경스러웠어.

그 이후 언니랑,
언니와 함께 했던 다른 배우들의
오래된 인터뷰 기사들과 영상까지
모두 찾아보면서
이런 가치관과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과
작업을 한다면
그 과정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엄마로 사는 건 의외로 참 외롭네.
그래서 맘이 자꾸 야들야들해지니까
이런 것도 거절당하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 봐
더 무서운 것 같아.
흑.
살살 얘기해 주세요.


메시지를 보내놓고 어찌나 떨렸는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심장이 벌렁 거리고,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았다. 이 날 썼던 일기장엔 ‘토할 것 같다’라는 표현이 세 번 등장한다.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떨렸던 걸까. 대학 입시 연극과 실기 시험장에 들어갈 때도, 공연 직전 무대 뒤에서도 이렇게까지 온몸으로 두려워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다. 내가 느꼈던 몸의 반응은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하여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힐 것만 같은 두려움.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개운함이 느껴졌다. 내가 언니에게 보낸 메시지 속에 진심이 아닌 것은 한 문장도 없었다. 솔직하고 진솔한 마음을 담았고, 내가 아닌 누군가를 억지스럽게 흉내 내지도 않았다. 나의 약한 부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지만 스스로에게 떳떳했다.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이제 기다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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