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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 Dec 26. 2023

8.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현재 진행형인 나의 소음 지옥.

불안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일상 속에서 심장이 발치에 떨어질 때마다 '이것도 소재로 쓸 수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나마 살만 하지 않을까 싶어,


살려고 시작하는 소음 일지.




<2023년 12월 5일, 화요일>

아침부터 종일 짐을 정리하고 가구를 옮기느라 분주한 듯 '들린다'. 이사를 왔으니 짐 정리하는 건 좋다. 당연히 해야 한다. 그런데 제발, 슬리퍼만이라도 신어줬으면 좋겠다. 정말, 앞에 두고 사정사정하고 싶다. 슬리퍼만이라도 제발 신어 달라고. 처음 10~20분은 그럴 수도 있지 싶다. 그러나 30분~1시간이 넘어가면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유튜브에 우울증과 관련된 영상들이 뜨길래 하나를 봤는데, 설명하는 증상 중 다음이 겹쳤다:


식욕 저하(체중 감소)

불면증

무기력함

집중력 저하


이런 상태가 수주 지속되어야 한다던데, 나는 한 달 정도 되어 가는 것 같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라고들 한다.

> 덕분에 집 밖에 더 많이 나가게 됐다.

> 오전에 누워 있을 수 없게 됐다.

>> 그럼 뭐 해. 집중력이 확 떨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고,

>> 불안과 분노로 머리가 가득 차 있는데.


점심을 먹고 스터디 카페로 도망쳤다.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롭다니. 내가 내는 숨소리조차 방해가 될까 봐 조용하게 되는 이런 환경, 너무 좋다. 1시 30분이 지나자 아마 위층 학원에서 나는 듯한 책상과 의자 끄는 소리, 아이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층간소음에 트라우마가 생긴 게 분명하다. 지금 들리는 이 소리는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일시적이라는 사실(즉, 이 공간을 벗어나면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층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내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독서 모임이 있어 9시 30분쯤 집에 도착했다. 어른 발소리는 여전히 나고 있었고, 10시가 넘으니 아이 뛰는 소리까지 서라운드로 함께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우리 둘은 다시 머리 위에서 울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TV를 보려 애썼다. 내 눈치를 보며 소음과 관련한 주제는 꺼내지 않으려 하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웃으로 만나게 된 건 좋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대체 이런 시련을 안기는 걸까. 왜 이런 고통을 안기며, 우리 일상을 파괴하며, 우리 집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걸까.


어제자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것을 하지 않겠다” “그것을 잊겠다” “그것을 내려놓겠다”라고 결심했다면, 먼저 마음으로 ‘그것’을 그려야 한다. 그다음에 애써서 ‘그것’을 생각에서 다시 밀쳐내야 할 테다. 이런 과정이 거듭될수록 되레 ‘그것’은 더욱 깊숙이 정신에 새겨져 버린다. 이른바,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Ironic Process of Mental Control)다. 하지 않으려 할수록, 벗어나려 할수록 안 좋은 생각과 행동에 깊이 빠져드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
다시 건강하고 밝은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속 '그림자 아이'  말고, '태양 아이'의 손을 잡아야 한다.


아예 '그것'과 관련한 생각 조차 하지 말아야 한단다. 안 그래도 요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계속 이렇게 생각해 왔다.


'할 수 있어, 이겨낼 수 있어, 이 정도 시련은 견뎌야지, 무시해 보자, 괜찮은 거야, 괜찮아.'


하지만 이 생각 자체가 쳇바퀴였던 거다. 내 뇌를 계속해서 고문하고 있던 거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해야겠다 싶었다.


그 순간, '쿵! 다다다다다'. 각오도, 결심도, 또다시 무너졌다.




<2023년 12월 6일, 수요일>

귀마개로는 발이 내는 진동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새벽에 깨닫고 다시 잠을 설쳤다.


이제 윗집의 일상 패턴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종일 짐 정리에 여념이 없군. 오전에 분노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견디지 못해 '악!' 소리를 질렀다. 상대방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봐야 아침 잠깐, 저녁 몇 시간 좀 시끄러운 정도는 참을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루 종일도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쿵쾅거리는 소음에서 오는 분노로 시작하고, 또 분노로 가득 차 잠자리에 들기 전 몇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그리고 가장 시끄러운 시간대는 남편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집에 있는 내내 그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남편은 무슨 죄죠?


솔직히 이젠 아침과 저녁이 오는 게 두렵다. 다음 날 출근이 싫어 아침이 오는 게 싫은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깊은 공포다. 주말이 올 것도 두렵다. 아침, 저녁이 아니라 하루 종일 이어질 테니까.


매트 깐다면서요. 언제 깔 건가요. 슬리퍼 좀 신어주면 안 되나요.

아파트 입주할 때 웰컴 키트에 소음방지 슬리퍼 좀 넣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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