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롱푸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원을 찾아가는 길은, 역설적으로 내가 가진 모든 높이를 깎아내는 과정이었다. 아내의 병은 우리를 지도 밖으로 몰아냈고, 우리는 떠밀리듯 티베트의 고원으로 향했다. 팡라 전망대에서 초모랑마를 마주했을 때, 정작 나를 압도한 것은 설산의 위용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가쁜 숨소리였다.
해발 5,000미터. 그곳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허락된 숨'만이 통용되는 곳이었다. 숨이 허락되지 않으면 인간은 수직한계도 허물어진다. 아내의 호흡은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고, 나는 그 느린 리듬에 내 심박을 맞췄다. 병실에서 기계음에 의지해 숨을 고르던 날들이 이곳 고원의 침묵과 겹쳐졌다. 빠른 자는 낙오하고, 오직 함께 걷는 자만이 남는 길. 우리는 그곳에서 비로소 '속도'를 버리고 '존재'를 얻었다.
롱푸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나는 우리가 왜 이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지 깨달았다. 계곡은 불필요한 계획과 성취, 구구절절한 변명들을 고도 아래로 던져버리게 했다. 돌과 바람, 그리고 얼어붙은 빙하뿐인 그 황량함 속에서 아내는 오히려 편안하다고 말했다. 소음이 사라진 자리엔 비로소 서로의 기척만이 선명하게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오히려 편안하네요."
나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했다. 계곡을 내려가며 나는 생각했다. 고행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내고 알맹이만 남기는 작업이라는 것을. 병마와 싸우며 아내의 육신은 야위어갔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우리는 밀라레파가 노래를 얻었듯, 이 고원에서 서로의 존재라는 가장 순수한 결실을 얻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롱푸사. 롱푸사(Rongphu)는 티베트어로 “롱(Rong) – 계곡, 푸(Phu) – 동굴·은둔처”, 곧 “깊은 수행자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사원 뒤편에는 바로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북벽이 솟아 있고, 앞에는 광막한 고원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사람의 말보다 바람과 호흡이 먼저 도착하는 곳이다. 사원 입구에는 작은 마당과 기도 깃발, 마니석이 놓여 있다. 낮은 돌담, 바람에 닳은 룽다(기도 깃발), 발길에 반질반질해진 마니석, 이곳에서 순례자는 자연스레 속도를 낮추고, 고개를 숙인다. 아내와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롱푸사로 들어갔다.
롱푸사 공간은 ‘보여주기 위한 법당’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공간이다. 작은 불상이 있고, 벽면에는 초모랑마와 수호신 도장되어 있고, 바닥은 오래된 카펫과 수행용 방석이 깔려 있다. 사원의 내부는 화려한 위엄 대신 소박한 앉을자리를 내어주었다.
버터램프의 그을음과 닳아버린 방석들 사이에서 우리는 다시 숨을 골랐다. 그 순간, 사원은 돌로 쌓은 벽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호흡 사이에 세워졌다. 우리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삼배를 올렸다. 여기까지 온 것에 감사드리며, 마음을 비우는 경건한 삼배였다. 하지만 그 삼배가 마치 108배보다 힘들었다. 고산지역에서 절을 하며 숨을 쉬는 것은 쉽지 않다.
사원은 돌로 세워지지 않았다. 먼저 사람이 앉아 있었고, 그 자리에 바람과 시간이 쌓여 비로소 돌이 남았다. 롱푸사는 그렇게 시작된 곳이다. 해발 오천을 넘는 고원에서 말은 자연히 줄고, 호흡이 앞자리에 앉는다. 문턱은 낮고, 복도는 짧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보여줄 것은 사라지고 앉을자리가 남는다.
이 사원의 내부 구조는 건축이 아니라 태도다. 처음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사람, 라마 텐진 노르부(Tenzin Norbu). 그는 1902년에 처음 롱푸사의 기초를 세웠다. 텐진 노르부는 사원을 세우러 오지 않았다. 동굴에 머물며 추위와 고도를 스승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가 앉은 동굴에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오자 그의 침묵을 가리지 않도록 작은 공간이 덧붙여졌고, 그렇게 롱푸사는 계획 없이 생겨났다.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환경 그 자체로 남았다. 그래서 이 사원에는 이름이 크게 남은 인물이 드물다. 대신 오래 버틴 사람들이 있다.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내려간 이들, 평생을 여기서 살다 기록 없이 사라진 노승들. 그들이 남긴 것은 설법이 아니라 호흡의 질서다. 그래서 이곳의 법당은 작고 어둡다. 중앙은 불상이 아니라 사람이 앉는 자리다. 사원 밖의 동굴들에는 늘 한 그림자가 겹쳐 있다. 밀라레파. 그는 동굴에서 자기 자신과 싸웠고, 노래로 자신을 깎아냈다. 그러나 텐진 노르부는 노래하지 않았다. 대신 침묵으로 남겼다. 둘은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앉아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나는 아내와 함께 법당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고른다. 아내의 숨은 짧고, 내 숨은 괜히 길다. 서로의 호흡이 엇갈리다 조금씩 맞춰진다. 이 단순한 리듬이 이 사원의 가장 오래된 수행이다. 여기서는 잘하는 호흡이 없고, 부끄러운 호흡도 없다. 멈추지 않는 것이면 충분하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가는 이들이 사원을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는 정상의 날씨를 묻고, 누군가는 사진을 남긴다. 롱푸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사람이 스스로 낮아질 때까지. 나는 문득 알게 된다. 이곳의 주인은 과거의 누구도 아니고 지금의 누구도 아니다. 오래 앉아 있었던 태도, 숨을 고르며 견뎌온 자세, 그것이 이 사원의 주인이다. 그래서 롱푸사는 에베레스트를 바라보는 사원이 아니라 사람이 사원이 되는 곳이다. 돌은 그 사실을 늦게 따라왔을 뿐이다.
"여긴... 작은 병실 같아요."
아내의 그 말은 슬픔이 아니었다. 병실도, 사원도, 결국 인간을 가장 단순하게 만드는 장소라는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롱푸사는 우리에게 정상의 좌표 대신 '지금, 여기'에서 내뱉는 숨 한 번의 무게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순례는 산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앉을 수 있는 자리까지 서로를 데려오는 일이었다. 초모랑마는 끝내 오르지 않아도 좋았다. 아내의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엇갈리던 숨이 하나의 리듬으로 합쳐지는 그 찰나의 평화. 그것이 우리 생의 가장 거룩한 성소였다. 우리는 평생 그 숨 하나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 숨 하나에 의지해 남은 길을 갈 것이다. 이 먼 길을 돌아 배운 것이 고작 '숨 쉬는 법'이라니. 하지만 그 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전부이자, 가장 위대한 기적임을 이제는 안다.
우리는 롱푸사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고 조금 더 앉아 있었다. 초모랑마는 여전히 창밖에 서 있고, 사원은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떠나지 않는 연습도 수행이 된다. 아내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질 때, 나는 그동안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아두었던 말을 낮은 숨에 실어 보냈다.
“여보, 우린 저 초모랑마를 오르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의 의지와 용기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감사해요. 보세요, 우리는 아직 이렇게 함께 숨 쉬고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요.”
아내는 대답 대신 내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그 짧은 떨림이 수만 마디의 기도보다 더 깊게 내 마음을 울렸다. 롱푸사는 에베레스트를 바라보는 사원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호흡을 바라보게 하고, 곁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사원이었다.
우리는 평생 그 숨 하나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 숨 하나에 의지해 남은 길을 갈 것이다. 이 먼 길을 돌아 배운 것이 결국 '숨 쉬는 법'이라 해도 좋다. 그 숨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임을, 이제는 온 마음으로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롱푸사 옆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말이 집이지 그냥 돌로 벽만 쌓아 올린 초막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초막. 초모랑마의 어둠과 적막만 고요하게 감도는 곳. 숨이 가빴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내와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어야 했다.
밤이 내려앉자 초모랑마는 산이기를 멈추고 하늘이 되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순례자인 나, 그리고
시공을 건너 제자로 남은 나—두 개의 내가 같은 어둠에 서 있었다. 별은 높고, 바람은 얇았다. 이곳에서는 말이 먼저 무릎을 꿇는다. 숨이 가르침을 대신하고 침묵이 문장이 된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밀라레파!
그의 밤도 이와 같았을까. 순례자인 나는 길을 따라왔다. 지도와 허가증, 몸의 피로와 아내의 숨을 살피며. 한 걸음마다 현실은 무거웠고 한 걸음마다 마음은 가벼워졌다. 산은 나를 시험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속도를 요구했을 뿐이다. 같이 멈출 줄 아는 속도—그것이 이 길의 예절이었다.
나는 시간을 버렸다. 동굴의 냉기와 별의 침묵을 배웠다. 과거의 죄와 미래의 성취를 같은 불에 태웠다. 밀라레파의 노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확함이었다.
“붙잡는 순간, 사라진다.”
그의 가르침은 늘 간단했고 그래서 더 잔인하게 정직했다. 별빛 아래에서 두 개의 나는 서로를 바라본다.
순례자인 나는 묻는다.
“이 고통은 어디로 가는가.”
나는 대답한다.
“고통은 가지 않는다. 다만, 나를 통과할 뿐.”
초모랑마의 밤은 위로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평등을 준다. 성자와 병자, 강한 자와 지친 자를 같은 빛으로 비춘다. 그 무차별 앞에서 나는 이름을 내려놓는다. 남는 것은 호흡, 그리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의식. 아내의 숨이 고르지 않을 때 나는 별을 다시 본다. 별은 멀리 있지만 방향은 정확하다.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 아니라 겹치려는 태도를 가르친다. 해탈은 도망이 아니라 이 밤과 완전히 겹치는 일임을.
아내는 숨이 점점 잦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초모랑마의 밤, 나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별빛이 초모랑마 정상에서 무수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만년설 위에 별빛은 유난히 발고 총총했다. 나는 새삼 우주 속에 무수히 빛나는 별의 존재를 마음속 깊게 각인시켰다.
5,000미터 베이스캠프의 밤하늘에서 별은 더 이상 먼 비유가 아니다. 숨과 숨 사이, 손바닥의 온기만큼 가까이 와 존재를 증명한다.
손에 잡힐 듯 별이 가깝다
순간, 나는 하늘에 매달린 별 하나가 된다. 초모랑마의 숨결에 잠시 빌린 빛으로. 그 별무리 사이엔 조지 말러리(George Mallory)의 별도 있고, 오르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이름 없는 산악인들의 별도 있다. 거기에 한국 산악인 박영식, 박무택의 별도 있다.
별빛이 가장 밝은 밤, 잠은 오지 않고 생은 더 또렷해진다. 고도는 생각을 비우고, 침묵은 질문을 데려온다. 밤하늘의 내 별과 산 위의 내 별이 서로를 바라본다. 위와 아래가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아마 답은 길의 끝이 아니라 이 질문을 품고 다시 숨을 고르는 태도일 것이다. 별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을 견디는 법을 나는 배웠다. 오늘 밤, 초모랑마가 가르친 것은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