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 자주 이야기보따리꾼처럼 내 이야기를 이고 지고 다니며 나누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내가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는지, 언제 구차하게 구는지, 내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언제 유쾌해지고 언제 소심해지는지, 무얼 못 견디는지, 무엇이 날 외롭게 하는지 있는 사족, 없는 사족 다 갖다 붙여 디테일하게 털어놓고 싶다가도 어른 1인이 지켜야 하는 매너 반경 거리에 대해 떠올리며 입과 손을 자제시킨다.
나는 누군가의 외로움에 대해 그리 소상히 알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무언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부담스럽진 않을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슬프진 않을까, 내 외로움과 견주지 않고 온전히 끄덕일 만큼 마음이 넓을까.
외로움을 서로에게 끼얹어보고 그 무게를 가늠하며 자위하느니 혼자 짊어지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염세주의자일까.
하지만 나는 삶의 수많은 순간 아름다움과 재미를 느끼기도 하는데. 집 근처 바닷가에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고 그 안개가 산 주름 틈틈이 끼어 햇빛에 뿌옇게 반사되는 모습을 백번 넘게 보고도 여전히 아른아른한 눈으로 쳐다보는걸. 막 걷기 시작한 작고 어린 사람의 오동통한 종아리를 보면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느끼는 걸. 짙은 속눈썹이 숲처럼 우거진 짙은 피부의 사람을 가만히 훔쳐보는걸.
물론 어떤 이야기들은 삼키는 대신 뱉기도 하는데, 뱉은 후 후회로 잠 못 이루는 밤도 있다. 그래서 말보다는 글로 털어놓는다. 말의 잉여성보다는 몇 번을 다듬은 글의 신중함이 더 좋다. 글 덕분에 여차저차 다른 성인들만큼의 매너 반경을 유지한 채 균형을 잡고 살고 있다. 글의 장점은 또 있다. 서로 직접적으로 '할퀴고 핥는' 과정이 없다. 내가 할퀴고 싶은 이에게 글을 썼다 한들 그가 안 보면 그만이고, 나를 위해 쓴 글이 아니건만 누군가의 글은 나를 핥아준다. 적어도 글을 되찾아서 다행이다. 적어도 글을 좋아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