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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May 21. 2020

슈퍼파워 잔소리

같이 사는 사람의 잔소리가 지겹다면



나는 누군가와 함께 밥을 지어먹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자기 전까지는 스스로가 이렇게 어마 무시한 잔소리쟁이란 걸 몰랐지. 연애시절엔 쿨하다 못해 좀 추운 편이었잖아. 질투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고, ‘네 인생은 네 거. 내 인생은 내 거’라는 주의였는데 말야. 사랑하는 누군가와 운 좋게도 함께 노력을 해서 관계가 깊어지고 같은 지붕 아래 살게 되면서부터 잔소리가 시작된 거 있지. 처음엔 생활 습관에 관한 잔소리도 많았던 거 같아. 룸메이트로서의 잔소리랄까. 내 편의를 위한 거기도 했지. 빨래 바구니에 바지를 넣을 때는 주머니가 비었는지 확인하라고 했잖아,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하던지 물에라도 담가두지 그래, 내 티셔츠는 이렇게 개지 말라니까, 당장 안 쓰는 방의 불은 재깍재깍 끄면 안 돼?, 같은 거. 그런데 그런 종류의 잔소리들은 같이 산 시간이 쌓이면서 반비례로 눈 녹듯 서서히 녹아 사라지더라고.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타협하는 동안 그런 잔소리들은 힘을 잃더라. 반면 여전히 꼬장꼬장한 노인처럼 매일 등장하는 잔소리는 오히려 그 사람의 안위에 관한 거야. 위가 약해서 속도 자주 쓰린 그 사람이 과식을 하고 바로 누우면 나도 모르게 그를 밀어 앉히며 나오는 잔소리, 다친 손목이 고질적으로 시큰거리면서도 무리해서 운동을 하는 그를 볼 때 탄식처럼 튀어나오는 잔소리, 몇 시간 동안 게임을 하느라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는 그의 눈이 벌게지면 유튜브에서 본 눈알 스트레칭을 시키며 쏟아내는 잔소리 같은 거 말이야. 


나는 잔소리가 사랑의 표현 중 하나라고 생각해. 물론 잔소리의 내용이 무어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요즘 내가 뱉는 잔소리에는 진득한 하트가 잔뜩 묻어날 거야. 그 사람이 걱정돼서, 그 사람이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에, 그 사람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그 사람에게 계속 관심을 쏟기 때문에 가능한 잔소리지. 그렇다고 물론 내 잔소리가 다 옳다는 건 아니고. 


문득 생각해보니 나에게 잔소리를 해주는 존재는 이제 거의 없더라고. 나의 삶에 잔소리를 해줄 만큼이나 관여하고 시시콜콜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어진 거지. 품 안의 자식이 성큼성큼 나가고 난 뒤 엄마는 나를 어려워해. 엄마의 잔소리가 그립다는 사람들의 말이 서른하고 셋이나 먹고 나서야 와 닿더라. 물론 같이 사는 그도 내게 종종 잔소리를 해. 아프면 제발 병원에 가자고, 너무 싫고 힘든 일은 억지로 하지 말라고. 그 사람의 잔소리는 객관적으로도 너무 스윗해서 잔소리 축에는 못 끼는 편이야. 자고로 잔소리란 등짝을 두 대 정도 때리고, ‘으이구, 으이구’로 시작해야 제 맛이잖아. 


그는 나를 만나 나의 잔소리를 겪으며 많은 것들을 바꿨다. 나의 잔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을 만나 행복해. 잔소리를 잔소리에서 끝내지 않고 그 안의 알맹이를 봐주는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야. 잔소리 파워 덕에 그는 때론 그를 아프게 하는, 그를 좀먹는 습관들을 되돌아보고 고쳐 나가기도 하니까 내 잔소리는 꽤 성공적이랄까.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볼게. 나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겐 쿨하다 못해 춥기도 하다가 그래. 근데 있지, 나는 누군가와 함께 밥을 지어먹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자기 전까지는 스스로가 이렇게 어마 무시한 사랑꾼인지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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