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방을 뜬다. 내 뜨개 실력은 어깨 너머 배운 거다. 옛날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우리 집 택호는 요꼬 집이다. 뜻은 모르겠지만 뜨개를 하는 집이라는 뜻 일거다.
엄마는 사람들에게 아기 옷 뜨는 법이랑 장갑 뜨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뜨개 방법을 숙지한 사람에게 실을 나누어주며 아기 옷이나 케이프 등을 짜 오라고 했다. 그분들은 며칠 후에는 아기 옷이나 케이프나 또는 장갑을 만들어왔다. 예쁘게 뜨는 사람도 있고 코를 빠뜨려서 다시 떠야 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곳을 들락거리다가 뜨개 하는 법을 배웠다. 그때 배운 실력으로 지금 가방을 뜬다.
정통으로 배웠으면 정품이 될 것을 어깨너머 실력이라 완성하고 나면 언제나 시원찮았다.
게이지 계산을 할 줄 모르니 아니하기 싫어서, 어쩌면 그까짓 것 안 해도 자신 있어서 눈대중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십 대에 조끼를 떴다. 친구가 애인 준다고 조끼를 짠다고 해서 나도 애인까지는 아니지만 남자 친구가 있어니 짜 주고 싶었다. 비둘기색 모헤어를 사고 대충 옷 사이즈도 알아놨다. 퇴근 후 줄곧 떴지만 한 달이 지나도 앞판도 못 떴다.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겨우 완성했다.
그런데 겨드랑이가 자꾸 오그라 들었다. 다시 겨드랑이 시작 점까지 풀었다. 내 사전에 다시 짜는 일은 없는데 꼼꼼한 이에게 선물할 거라 정성을 들여야 했다. 겨드랑이부터 다시 뜨는 중에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 앞 판이 반 정도가 날아간 그 조끼는 대바늘이 꽂힌 채 다음 해 겨울에도 그대로 있었다.
선물 안 했길 잘했다며 몇 번이나 안도했다. 헤어질 때 다시 받는 것도 우습고 그냥 놔두는 것도 용서할 수없었다. 그가 안 입을게 뻔한데 나의 정성이 구박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어깨 실력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꼼꼼한 그와 결혼했더라면 둘 다 힘들었을 텐데 그것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 후로도 가끔씩 뜨개질을 했다. 모자를 짜면 갓 부분이 늘 들쭉날쭉 말썽이고 벙어리장갑을 짜면 손가락 쪽이 너무 넓어서 미운 적도 있었다. 조금 이상해도 털털한 성격인 나에게는 별 문제가 안되었다. 간혹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가방 뜨기는 처음에는 60코로 시작했는데 반쯤 짜올라갔는데 너무 늘어진 것 같았다.
다시 슬쩍 한 코씩 건너뛰어 조금씩 줄여서 뜨는데도 헐거운 느낌이다. 이번에는 좀 더 촘촘하니 당겨서 짰다.
거의 완성 단계로 갔는데 가방이 비뚜름하다.
서푼 어치 어깨너머 실력으로 책도 안 보고 어림짐작으로 뜨니까 이 꼴이다 이제 와서 풀어서 다시 하려니 아까워서 못 풀겠다. 누가 자세히 보는 것도 아니고, 대충 여름 기분 내는 거니까 밀고 나갈까 생각하다가 멈췄다.
매번 이러는 내가 싫다. 하나를 알아도 똑바로 알고 넘어가야지 이런 식이니까 인생도 두루뭉술하게 지나오지 않았나 싶어 안타깝다
윗부분이 좁아져서 비뚜름해진 가방을 바닥에 폈다. 어떡할꼬. 다시 반 정도 풀어서 새로 뜰까 아님 그냥 비뚜른대로 들고 다닐까. 손으로 좁은 윗부분을 힘껏 펴니 약간 반듯해 보인다. 새로 뜨면 공들인 시간이나 수고에 비해 여름 한철만 들고 다닐 건데 가성비가 안 나온다.
이리저리 망설이는데 남편이 훈수를 뜬다.
"그냥 새로 짜라.
하나라도 정확하게 좀 해라. 사람이 어찌 그래 매사 두루 뭉실하노."
그때 결정했다. 마지막 코에 바늘을 빼고 마무리를 했다. 두리뭉술한 내 성격을 존중하기 위해서
두루뭉수리니까 까다로운 당신을 견디며 삼십 년 세월을 보냈고 두루 뭉수리라 별난 당신 어머니와 그럭저럭 잘 지냈는 줄 아시유
마직 원피스를 입고 내 작품을 들어보았다. 딱 어울리는 게 비뚠 곳은 숨었는지 보이질 않는다. 대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