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먼지같은 존재일지라도

영화 '애드 아스트라'는 삶의 허무를 어떻게 견뎌내는가

by 손정빈

우주에 관해 내가 아는 건 많지 않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우리 은하'로 부른다는 것, 우리 은하 안에는 태양계와 같은 행성계가 최소 수천억개 있고, 또 우주 전체에는 다른 은하계가 최소 수천억개 있다는 것 정도다. 우주 전체로 보면 태양계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데, 인류는 이런 태양계에 관해서도 다 알지 못 한다. 그래서 나는 우주를 생각할 때마다 인간과 먼지를 함께 떠올린다. 우주를 향한 경외심 같은 건 없다. 그저 '난 참 작은 존재'라고 되뇐다. 염세주의는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 뿐. 그러니 지구를 박차고 나와 이 무한한 우주를 향해 가는 인간을 상상하면 그 담대함에 경탄하면서도 그 움직임이 때로 외로워 보여 슬프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며,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미지의 우주에 대한 두려움은 인류에겐 극복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도 그랬다. 우주로 나아가 지구가 아닌 별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건설하고, 외계인에 맞서 우주 전쟁을 벌이며, 우주의 움직임으로 인해 지구에 닥친 재앙을 인간이 힘을 모아 극복하는 이야기가 한 때 유행했다. 영화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이런 종류의 작품 두 세 편 정도는 지금도 제목까지 정확하게 떠올릴 것이다. 그 영화들은 마치 이렇게 외치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은 약하지 않다. 인간은 위대하다. 결코 먼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작다고 해서 그 존재 가치마저 그런 건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런 시기였다.

영화계가 '우주 콤플렉스'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이 흐름을 본격적으로 바꾸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영화예술가들이 우주가 배경인 영화를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고, 우주를 보는 시각도 유사했던 것. 문을 연 건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2013)였다. '그래비티'는 우주를 지구라는 현실에서 벗어난 공간, 아무것도 없는 장소, 죽음에 가까운 곳 정도로 그렸다. 주인공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록)에게 우주는 그저 '일'을 하는 곳이다.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2018)도 그렇다. 인류 최초로 달에 가는 데 성공한 인간을 담았으나 이 영화엔 성취의 쾌감이 없다.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은 지구에서 겪은 아픔을 잊기 위해 무작정 먼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달에서 그는 침묵한다. 우주는 고독의 공간이다. 그러니까 이건 우주 극복 서사의 대척점에 있는 지구 탈출 서사다.


우주를 손 안에 넣는(극복) 이야기는 대개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런 영화들은 인류의 실현되지 못 한 욕망을 해소하면 끝난다. 가령 우주 기지 건설에 성공하거나 그 과정에서 지구를 존속케 하는 동력을 확보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재앙을 극복하면 마무리된다. 반대로 지구를 떠나는 이야기는 다소 모호하다. 지구를 떠나 우주로 가면 끝이란 말인가. 스톤과 암스트롱은 똑같은 상실의 아픔(딸의 죽음)을 겪은 뒤 우주(탈출)를 원했다. 소란에서 벗어나 끝없는 고요 속에 파묻히길 바랐을 게다. 그런데, 이들은 기어코 지구로 돌아왔다. 도대체 왜? 죽지 못 해서인가, 남겨진 가족을 외면하지 못 해서인가. 지구에서 벗어나길 그토록 원할 땐 언제고? '그래비티'와 '퍼스트맨'은 이 물음에 어떤 답도 주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쉽게 답을 내놓고, 다른 이야기는 미심쩍은 결론을 도출한다.

6.jpeg 그래비티
7.jpeg 퍼스트맨

극복과 탈출이 동시에 있고, 너무 성급하고 간편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과도하게 혼란스러운 결론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영화가 최근엔 왜 나오지 않는 거냐고 불만을 쌓아가고 있을 즈음 한 작품이 나왔고, 이 영화가 내 불평을 잠재웠다. 제임스 그레이의 '애드 아스트라'(2019). '애드 아스트라'는 무한한 우주를 정복해보이겠다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한편 광대한 공간 속에서 먼지처럼 보이기 만하는 인간 존재의 허무에 관해 말하며, 이 어쩔 수 없는 공허함 속에서 우리가 주어진 삶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에 관해 돌아본다. 그리고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아닌 지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짚어낸다. 말하자면 제임스 그레이는 우주 영화들이 지금껏 해왔던 것을 하면서 동시에 하지 않았던 것을 한다.


영화는 인류가 태양계 마지막 행성인 해왕성까지 갈 수 있는 기술력을 갖게 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미국 우주사령부 소속 소령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가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클리포드는 역대 최고 우주비행사로 꼽히는 인물로 20년 전 지적 생명체를 찾아 인류 최초로 해왕성까지 갔다가 실종됐다. 20년 후 우주에서 발생한 이상 현상으로 지구가 위기에 빠지는데, 우주사령부는 그 원인이 해왕성 부근 비행 물체임을 확인한다. 클리포드가 탔던 바로 그 우주선. 사령부는 아버지를 따라 우주비행사가 됐고 실력 또한 뛰어난 로이를 불러 부친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화성 우주 기지로 가서 전파 메시지를 통해 이상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아버지를 설득하라고 명령한다.


"늘 그렇듯이 난 또 비행 중이야." 로이가 화성으로 가기 전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 아내 이브(리브 타일러)에게 썼다 지운 편지 중 일부다. 이 대목은 '그래비티'의 주인공 스톤을 떠올리게 한다. 스톤은 딸을 잃은 뒤 우주로 도피했다. 무의미한 삶이기에 그녀의 인생엔 지구에 발 붙이고 살아야 할 중력(그래비티)이 없다. 이유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로이도 유사한 캐릭터로 추측된다. 수십킬로미터 상공에서 일 하다가 추락하는 사고가 담긴 오프닝 시퀀스에서 그는 "여기 있으면 편안한다. 우주가 나의 공간"이라고 했다. 그는 "눈은 늘 출구를 바라본다"고도 했다. 이 대사는 한편으로 암스트롱과 겹친다. 암스트롱은 지구에서 상처 입을 때마다 망원경을 들고 달을 봤다. 친구의 위로도 물리치고 그저 지구 밖을 봤다.


로이는 스톤과 암스트롱처럼 지구 탈출 서사의 주인공으로 보인다. 스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지구의 소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고, 암스트롱은 그가 살던 시대의 과학 기술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떠났다. 로이도 그렇다. 화성에 도착한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지구에서 가장 먼 해왕성을 향해 간다. 다만 앞서 나는 '애드 아스트라'에는 '그래비티'와 '퍼스트맨'에 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로이가 스톤·암스트롱과 유사한 캐릭터라는 건 부정할 수 없으나 우주 어느 지점에 머무르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어떤 목적을 위해 이동한다는 건 명백한 차이다. 바로 아버지 클리포드. 로이는 말한다. "내가 곧 당신일까요? 똑같은 어둠 속으로 끌려내려가고 있는…"

화성에서 끝나야 했던 로이의 여정이 태양계 끝으로 이어지는 건 아버지의 비밀 때문이다. 화성에서 알게 된 클리포드의 비밀은 아버지가 지적 생명체를 찾아 인류 최초로 해왕성까지 간 선구자이지만, 원하는 걸 찾지 못하자 다시 지구로 돌아가려 했던 동료를 죽이고 홀로 그곳에 남아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살인자이기도 하다는 것.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었다. "이 무한한 우주를 놔두고 지구에 쳐박혀 인생을 낭비하다니." 동시에 로이의 허무에 관한 진실도 드러난다. 로이는 아버지를 동경해 아버지처럼 우주비행사가 되기로 했고, 그렇게 됐다. 로이에게 클리포드는 세계의 기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그가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기준이 사라졌고, 로이는 분노했으며, 그 고통에 세상과 담을 쌓았다.


'모든 지적 생명체는 언제쯤 찾게 될까.' 클리포드에겐 이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구를 떠났다. 오직 이 물음의 답을 찾는 것만이 삶을 지탱하니 이미 인간이라는 지적 생명체가 있는 지구의 모든 게 무의미 했으리라. 그래서 아들을, 아내를 버렸다. 지적 생명체를 찾아내는 일이라는 건 광대한 우주에 관한 이해를 상징한다. 인간의 이해가 닿지 못 하는 게 있다는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 어딘가 익숙하다. 이건 우주 극복 서사이고, 클리포드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아닌가.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신의 일을 하고 있어!" 우주를 창조한 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우주를 다 알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이렇게 위악을 부린다. "인간은 불가능을 극복해야 한다. 과학이 부정하는 존재를 찾아내야 돼."


이제 지구 탈출 서사의 주인공은 우주 극복 서사의 주인공을 만난다. 우주 사령부는 로이의 전파 메시지가 통하지 않자 클리포드가 탄 우주선 제미니 프로젝트를 폭파시키기 위해 화성에서 해왕성으로 핵폭탄을 탑재한 우주선을 급파하고, 로이는 이 사실을 알고 잠입한다. 그리고 로이는 (마치 아버지처럼) 자신을 방해하는 동료를 의도치 않게 죽게 하고 해왕성에 도착해 클리포드와 재회한다. 로이에게는 두 가지 미션이 있다. 하나는 제미니 프로젝트에서 시작돼 지구에 재앙을 가져오고 있는 이상 현상을 막는 것, 다른 하나는 아들을 허무 속으로 밀어넣은 아버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직접 만나 얘기를 들어보는 것이다. 이상 현상을 막는 건 누가 해도 상관 없으나 아버지에게 들을 말이 있는 건 아들 뿐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로이와 클리포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의 공통점 없는 캐릭터라서 두 사람 사이엔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애드 아스트라'가 앞서 말한 두 가지 다른 우주 서사의 흐름과 다르지 않다면 로이에겐 허무만이 가득한 지구로 돌아갈 이유가 없고, 기어코 지적 생명체를 찾아냈을 클리포드는 지구로 돌아가면 그만이라서다. 이때 제임스 그레이는 다른 길을 택한 뒤 서사의 도약을 시도한다. 로이는 삶의 무의미 속에서 허우적대지만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려는 인간이다. 그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사람처럼 되긴 싫다. 아버지처럼 되긴 싫다"고 말하고 있다. 클리포드는 20년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우주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아버지가 연구한 우주는 아름다웠으나 그 멋진 겉모습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흥미로운 건 이 설정이 로이(지구 탈출)와 클리포드(우주 극복)를 그들과 무관해 보였던 서사의 주인공으로 자리바꿈한다는 점이다. 지구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 해 우주를 부유(浮遊)했던 로이는 지구 가장 먼 곳에서 아버지를 만난 뒤 도피처였던 우주가 지구보다 더 허무한 곳이란 걸 알았다. 그러니 더이상 우주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곳엔 어떤 것도 없으나 지구엔 그를 사랑해줬던 아내가 있다. 그렇게 로이는 지구에서의 허무를 우주의 더 지독한 허무로 뛰어넘는다. 지구 탈출 서사의 주인공은 무의미의 심연을 들여다 본 뒤 우주 극복 서사의 새로운 주인공이 된다. 로이가 제미니 프로젝트를 폭파한 힘으로 지구에 돌아온다는 설정은 중요하다. 그 우주선은 우주를 해석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지만 오히려 그곳이 불가해한 것임을 더 명확히 했다. 제미니 프로젝트는 무의미의 상징이다. 로이는 그 상징을 부순 힘으로 지구에서 다시 삶을 시작한다.

클리포드는 우주에서 죽는다. 우주 극복 서사의 주인공은 그렇게 지구 탈출 서사 주인공의 합당한 결론을 향해 가버렸다(지구로 돌아올 이유가 없으니 복귀 하지 않고 죽어버리는). 그는 우주엔 인간 외에 지적 생명체가 없음을, 최소한 인간의 지식으로는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없음을 혼자 알았다. 20년 동안 진행해온 연구 결과가 공개되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을 속이고 계속 우주 속을 찾아헤맬 수 있었으나 로이가 자신의 연구를 확인했고, 사실상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없다는 게 공표됐다. 인간 외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고, 그걸 찾을 수 있다는 확신 그 자체가 클리포드였다. 그 확신이 무너졌으니 지구도 우주도 더이상 의미가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따라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죽어버리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로이가 말한다. "아버지가 연구한 우주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멋진 겉모습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도 미움도 빛도 어둠도. 그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 앞에 있는 건 보지 못 했다."


결국 '애드 아스트라'는 허무를 이기지 못 하고 우주에서 죽은 아버지가 아니라 허무를 이겨내고 지구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다. 그러면 허무주의자 로이 맥브라이드는 이제 삶을 긍정하게 된 걸까. 그렇게 본다면 로이의 변화는 너무 극적이고 단순해서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면 그의 변신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우리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우주) 또한 의미가 없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이 무의미한 고통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 그저 내가 가진 것(지구)에 만족할 수밖에. 지구에 대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었던 제미니 프로젝트의 이상 현상은 세계의 허무를 억지로 극복하려 했을 때 발생했다. "이제 소중한 것에만 집중해서 살 겁니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가까운 사람들과 의지하며 살면 되죠." 허무주의자 로이는 이제 비관론적 희망주의자가 됐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애드 아스트라'를 내밀고 싶은 이유는 이것이다. '퍼스트맨'에서 암스트롱이 달에 도착해 깊은 고독 속에서 보는 건 지구다. 지구를 벗어나기 위해 혼신을 다했는데, 달 위에 서니 그렇게 도망치고 싶던 지구가 보인다. "아마 우리가 오래 전에 봤어야 할, 그러나 미처 보지 못 했던 뭔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겠죠." 암스트롱이 말했던 그 뭔가는 결국 그의 삶이 있는 바로 그 장소였다. 그게 로이가 말하는 가까운 데 있는 소중한 것,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우주 저 멀리 갔던 사람이 지구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의 제목이 왜 '별을 향하여'(ad astra)인가. 그건 너무 자주 쓰여 이제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 바로 이 말 때문이다. '인간 하나하나가 별이다.' 로이는 별을 향해 갔다.


(글) 손정빈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멀티버스 존재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