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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으로만 Nov 19. 2022

내게 글쓰기란?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인플루언서들을 심심찮게 본다. 확실히 전보다 많아졌다. 그래서 내게 글쓰기란 것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곰곰 생각해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게 글쓰기는 밥벌이를 가능하게 해 준 도구였다. 바꿔 말하면, 내가 글 쓰는 걸 두려워 했거나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나 글 쓰기를 싫어했다면 밥벌이를 못 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1. 시작은 일기

나는 일기 쓰는 걸 좋아했다. 국민학교 때 일기를 제출하면 선생님들은 곧잘 A+를 매겨 주셨기 때문이다. 일기에 점수를 매기다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세상 말도 안 되는데 이 말 안 되는 짓이 내겐 동기부여였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일기 쓰기는 더 이상 검사와 칭찬이 없어진 후에도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 계속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일기 쓰는 걸 싫어하셨다. 국민학교 때는 글을 잘 쓴다며 칭찬해 주셨는데 나이가 들수록 내 일기 내용을 마음에 안 들어하셨다. 종종 내 일기를 훔쳐 보신 후 한번씩 참다 못해 내게 코멘트를 하셨다. 친구들에게 너무 목 매지 말라거나, 남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 왜 그렇게 일기장에 시시콜콜 쓰냐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남의 일기를 왜 보냐는 항변은 소용 없었고(딸이 왜 남이냐는 엄마들의 흔한 응수가 따라왔다) 나는 일기장을 꽁꽁 숨기거나 늘 학교에 들고 다닐만큼 치밀하지는 못해 엄마는 계속 내 일기를 보셨다.


엄마의 검열은 늘 신경이 쓰였지만 내 감정을 기록하는 걸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검열을 의식한 나머지 백프로 솔직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필터링 했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속내, 특히 아픈 속내를 보기 편할 리 없는 엄마는 급기야 '일기 좀 그만 쓰라'고도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말씀하신 엄마가 이해된다. 내 일기는 신세한탄을 넘어선 배설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누구 때문에 속상하다, 게으르게 지내서 후회된다, 누구의 이런 행동이 못마땅하다 이러고 있으니 차라리 모르고 안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그러면 일기를 안 보시면 되는데 한번씩 꼭 보시고는 나를 나무라셨다)


엄마의 지속적인 피드백 덕분에 나도 찌질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남기는 건 찌질함을 픽스하는 것, 쿨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밤중에 들어와 쓰러져 자고 해가 뜨면 뛰쳐나가는 생활을 하느라 일기 따위 쓸 틈이 없었던 대학 입학 이후에는 연애가 내 일기의 이유가 돼 주었다.


내용은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알콩달콩 연애를 하니 아무개가 뭐 해 줘서 좋았다거나, 키스나 스킨십 같은 달달함이 있을 법도 한데, 그때나 지금이나 은밀하고 야한 장면, 그것도 내가 겪은 걸 묘사할 만큼의 배포가 내겐 없다. 일기장을 채운 내용은 역시나 아무개의 그런 모습이 싫다, 아무개는 왜 내 마음을 몰라줄까와 같은 투정과 불만으로 점철됐다.






2. 홍보담당자의 글쓰기

첫 직장은 공연기획사였다. 음대 나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예술의전당 무대 뒤를 무전기 들고 뛰어다니는 게 멋있어 보여, 당시 나를 예뻐해 주시던 피아니스트 선생님을 찾아가 청탁했다. 어이없게 뻔뻔하고 철 없었지웬일인지 선생님은 바로 전화를 걸어 주셨다. 규모도, 조직 체계도 없던 회사는 낙하산으로 나를 뽑아주었다. 면접에서는 영어와 운전을 할 줄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어쩌다 이 2개를 할 줄 아는 상태였다.


그 때 '뭐가 이렇게 쉬워?'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좋아할 게 아니라, 이런 회사는 엉터리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파악하고 다시 생각했어야 했는데, 졸업 후에 대한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음대생은 뽑아준다는 데 감격해 월급 70만원 수습 사원이 된다. 직장생활 대장정의 첫 단추라는 건 전혀 모른 채.


입사해서 제일 처음 해야 했던 일은 공연장에서 쓸 팸플릿에 들어갈 아티스트 프로필과 연주곡 설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 작성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스폰서 없이 오로지 티켓 판매 금액만으로 사업을 꾸려야 하는 공연기획사는 큰 돈이 드는 광고는 할 수가 없다. 지속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건 기본적으로 돈이 들지 않는 언론 홍보. A4 2장을 넘지 않는 분량으로 해당 공연에 대한 기사의 기초가 되는 보도자료를 만드는 일은 언론 홍보의 출발이다. 그 회사에 다닌 10개월 동안 나는 수십개의 공연을 담당했고 수십개의 보도자료를 썼다.


과거 선배들이 써 놓은 보도자료 양식에 아티스트 이름, 공연 일정 등만 갈아끼우는 식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백지 상태로도 쓸 수 있게 숙련됐지만, 모두가 일정에 쫓겨 정신없던 기억 외에 제대로 보도자료 작성법을 배운 기억은 없다. 당시 내 보도자료를 보고 기자들은 분명 혀를 찼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하고 싶었던 공연기획 보다는 언론홍보 경력을 갖게 됐고, 역시 공연기획사였던 두번째 직장에서도 홍보를 담당했다. 수완 좋았던 대표가 공연 업계에서는 전무했던 VC 투자를 유치하고, 유명 아티스트 대형 공연도 뻥뻥 터뜨리며 승승장구하(는 줄 알았)던 회사는 99년 연말 공연 이후로 급격히 기울더니 급기야 월급이 안 나올 것 같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집은 IMF를 정면으로 맞아 나는 말 그대로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상황이었다. 월급이 안 나오는 회사에는 다닐 수 없었다. 새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기댈 곳은 풍비박산 난 가정 환경에도 이기적으로 꾸역꾸역 다녔던 야간대학원 인맥 뿐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홍보 회사에 다니고 있던 대학원 동기 언니와 무작정 점심 약속을 잡았다. 식사 후 언니는 사무실이 지척이니 잠깐 들어왔다 가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갔던 그 자리에서 나는 바로 채용되었다!


대표는 이력서도 없이 그저 지난 2년 간 공연기획사에서 언론홍보를 했다는 말만 듣고 현재 연봉을 묻더니 가볍게 두 배로 올려주겠다며 '월요일부터 출근할 수 있죠?' 이랬다. 대표가 좀 특이한 분이기도 하지만, 그 때가 창업 후 6개월, 마침 직원을 막 찾고 있었던 시기였던 이유가 컸다. 한마디로 나는 억쎄게 운이 좋았다.


2000년. 실리콘밸리에서 건너온 닷컴버블이 우리나라에 벤처 붐을 일으켰던 바로 그 때였다. IT라는 생소한 용어가 급속도로 확산되던 시절, 내가 써야 할 글은 추상적인 표현이나 형용사가 허용되던 문화면 기사용 보도자료가 아니라, 기업과 그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담은, 산업부 기자들에게 전달 글이었다. 숫자와 약어가 가득한 자료 앞에 그간 썼던 공연 보도자료는 애들 장난 같았다.


회사는 슬기롭게도 내게 난이도가 낮은 인터넷 기업을 맡겼다. IT 장비 회사 같은 클라이언트는 용어부터 생소하고 봐도 모를 기술이 즐비했지만, 웹사이트를 조금 들여다 보면 어떤 서비스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회사들이 내 클라이언트였다. 하루 아침에 바뀌어 버린 분야에서 낯설기는 해도, 한 6개월쯤 보도자료를 기계처럼 찍어내고, 클라이언트 미팅, 기자 미팅을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스스로 홍보대행사 AE로서의 정체성을 장착할 수 있었다.


대행사에서 3년 남짓 일한 후 클라이언트 중 하나였던 회사로 소위 인하우스 이직했다. 인하우스에서도 홍보팀은 주구장창 보도자료를 쓴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리는 스트레이트 기사용 자료, 좀더 심층적인 내용을 다루는 기획 자료, 업계 소식을 모아서 구성한 묶음 자료, 기자들이 요청하는 자료 등등 유형은 다양하지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유형은 사장이나 임원 이름으로 나가는 칼럼이었다. 아무리 사장을 안 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 머리 속을 들여다 본 것도 아니고, 나도 내 속을 모르는데,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어떻게 내가 우리 사장, 상무 이름을 달고 나가는 글을 쓰나? 그 때도 기가 막혔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건 명백한 사기다. 나도 그 사기에 가담했으니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아무튼, 잊을 만 하면 칼럼 요청이 들어오는데 나는 말 그대로 피를 토하며 썼다. 그 어떤 보도자료 보다도 괴로웠고 오래 걸렸다. 몇 자 안되는 칼럼 하나에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팩트나 현상에 대한 의견, 해석, 그리고 그 해석은 우리 회사와 이렇게 연결된다로 귀결시켜야 하는 기승전결의 얼개부터 칼럼이 실릴 언론사 성향을 고려해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대중이 우리 회사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갖게 해서는 안 되므로 중립적인 입장이면서도 내용은 있어야 했다. 글의 내용이 곧 쓰는 사람의 생각인데 안 그래도 중립적이어서 미적지근한 의견을 본인도 아닌 다른 사람이 쓴다고 생각해 보라. 스프를 반만 넣은 라면을 먹는 느낌 아닐까?


아무리 대필이라도 홍보담당자의 초안을 가지고 사장에게 검토 받아가면서 생각을 나누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시라도 계실까봐 말씀드리는데, 사장은 말 그대로 승인자로, 자기 이름으로 나가도 문제 없을지를 기준으로 자료를 컨펌할 뿐 노무현 대통령과 강원국 작가 간에 오간 그런 담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그 일을 할 때는 그랬다. 신문 기고문을 직접 쓰는 CEO가 있다면 정말 칭찬감이다.






3. 다시 글쓰기

언론사에 보내는 각종 자료들로 매일같이 글을 써대서 그런지, 홍보팀에 있는 동안에는 하지 말라 소리를 들어가며 몰래몰래 쓰던 일기도, 블로그도, 그 어떤 산문도 쓰고 싶지 않았다. 한번 꺾인 글쓰기에 대한 욕구는 마케팅, 사업부서로 옮겨 더 이상 보도자료를 쓰지 않게 됐을 때에도 다시 생겨나지 않았다.


어느덧 이메일 작성이 글쓰기의 전부가 되고, 메일 쓰고 해석하는 게 일이 되었다. 주술이 명확하고 뜻이 명료한 경우도 있었지만 장문 속에는 비문도 속출하는 법, 메일 공해를 실감했다. 회사원에게 글쓰기는 별로 중요한 덕목이 아니었고 그리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나마 내가 조금 낫다고 자부할 수 있는 분야를 나부터가 무시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아마존에서는 회의에서 파워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워드 문서를 공유하고 글쓰기를 중요한 역량으로 본다는데, 만약 내가 그런 회사에 다녔다면 달라졌을까? 거기서 거기인 보도자료와 칼럼 대필에 머물지 않고 블로그에 뭐라도 꾸준히 썼다면 지금 뭐가 되도 되지 않았을까?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회사에서의 평가가 전 같지 않고 급기야 저성과자 평가를 받은 후다. 그나마 남들보다 나은 걸 찾다보니 글쓰기로 귀결되었다. 방치했던 블로그에 다시 글을 끄적이고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퇴사한 지금은 사업과 글쓰기를 연결하기 위한 궁리를 한다. 내 사업의 특별함을 글쓰기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평균과 평균을 합하면 특별함이 된다는 가설을 믿고, 평균(어쩌면 평균 이하)인 사업 수완과 역시 평균(또는 이하인)인 글쓰기 실력을 원의 이쪽 점과 저쪽 점이 만나 원이 완성되듯 만나게 해 볼 작정이다.


밥벌이를 시작하고 사람구실하게 해 준 글쓰기에 다시 한번 기대어 보려고 한다. 내 경험과 생각이 어떻게든 쓰이고 도움된다면 나는 기꺼이 적으련다. 도대체 무엇을 써야 할지 여전히 고민이 되지만 적어도 예전 일기처럼 하소연과 신세한탄만 하지는 않을 것은 확실하다. 흔치 않아서 어색한 '글 쓰는 그릇장수'가 돼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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