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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Jul 30. 2023

한강의 시간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내려다본다.

물끄러미 시선이 향한 곳은 멀리 아나콘다 같은 한강. 그 망연한 시야를 비집고 들어온 호랑나비 한 마리.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한강, 그 미지의 영역을 헤매다 아스라이 안개에 휩싸일 때 나비 한 마리가 나타나고는 했지.

'이제 그만. 이제 그만하고 걸음을 내딛어라. 미지의 세계를 뒤지는 일은 이만하면 됐으니 날갯짓하며 생동하는 나를 보라. 여기에 생이 있다.'하고 갇힌 세계에서 나를 끌어내고는 했다.



한강의 시간이 필요한 시절이 있었다.

먹먹한 가슴이 얼얼할 때, 목까지 차오른 설움이 울대를 찔러 숨이 막혀올 때, 눈 뜨고 바라봐야 할 것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때, 결핍일 수도 그래서 더 욕망일 수도 있는 잔이 차오르다 넘쳐 그 바람에 미끄러져 버렸을 때, 보호받고 싶은데 기댈 곳이 없었을 때, 내 심장을 찌른 것이 사실은 원망할 일 탓이 아니고 억울할 일 탓도 아니고 바로 나였음을 깨닫고 회한의 세월이 아까워 눈물겨울 때, 화도 슬픔도 두려움도 뭣도 아닌 그저 텅 빈 가슴일 때, 나는 한강을 마주하고 섰다.

그 미지의 깊이에 해답이 있을 것만 같았을까, 흘러가는 강물 따라 그 시절도 흘러가 버리길 바랐을까.

아니면 말 못 할 그 속을 한강은 알 거라 믿었을까. 아무 말하지 않아도 그저 다독여 주던 한강의 시간.

한강은 깊고 깊은 속에 모든 것을 품고 그저 입을 다물고 있다. 한낮의 금빛 윤슬, 달밤의 은빛 윤슬 모두 아름다운 채, 길고 긴 서사를 품고 흐르는 물. 그 비밀스런 기억들.

비가 온 뒤 위, 아래가 뒤집혀 잔잔한 물빛마저 진흙탕 황토빛 될 때가 기회가 된다. 깊고 깊이에 잠긴 비밀의 발견.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파래진 한강은 모든 것을 품고 침전하니 나도 그만 모든 것을 잠재워야 한다.



양 무릎을 안고 고개를 그 사이에 떨구어 턱을 괴고 몸을 동그랗게 접어 가장 작은 나로 한강의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자 하니, 흰나비 한 마리 난다. 지나간 시간을 안고 저 멀리 날아간다. 이제 그만 이별하라 한다.

어디선가 날아든 또 다른 노랑나비 한 마리. 이제 그만 자리 털고 일어나 노란 손 잡고 가자 한다.

그리하여 나선 무거운 걸음이 걷다 걷다 가벼워지고, 다시 쥐가 나고 뭉치고 결리다 다시 가벼워지고, 부드러운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나니 지금의 내가 되었다.



때로는 웃는 얼굴로, 때로는 우는 얼굴로, 때로는 무표정으로 찾던 한강은 언제나 묵묵히 나를 품고, 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유유히 흘렀다. 떠나는 내 등 뒤에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다시 찾은 나를 어서와 하며 반긴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든 찾아갈 곳이 있다.




#한강 #인생 #세월 #위로 #쉼 #나비 #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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