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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Aug 23. 2023

기이한 경험을 하곤 한다

그때 그 아이

나는 몇몇 기이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경험들은 내 삶에 굵직굵직한 획을 그었다. 그중 한 가지는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그 일이 있기 전인 1학년 7월에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대학로 르샤라는 카페에서 만났는데, 지금은 스터디카페로 용도변경한 데다 관리도 잘 되지 않아 옛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2층 짜리 스타코 외벽의 단독 건물이었는데, 실내에 들어서자 통유리로 들어오는 오렌지빛 햇살, 그 햇살이 비추는 온통 흰 실내, 깨끗한 소파를 덮은 흰 무지 면원단, 한쪽 벽면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2층으로 올라서자 덩그러니 빈 실내에 홀로 앉아있는 그 아이의 등판이 보였다. 흰 소파 위에 흰 폴로티셔츠를 입고서.

등판을 바라보며 다가가 그 아이 앞에 앉아 인사를 나누는데,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나. 이상하다. 전혀 만난 적이 없는데. 어디서 만났던 사람 같아. 이상하게 편해. 가족보다도 편안한 이 느낌은 뭐지. 내가 왜 이런 느낌이 들지? 참 이상하다.'


참고로 나는 절대 사람을 편하게 만나는 성격이 못 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가족보다 편하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을 그때껏 어디서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간직한 채 동갑인 그 아이와 편안한 친구가 되었다. 사귀기로 한 것은 아니고 그냥 너무 편하고 좋은 남자 사람 친구였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 아이가 사귀자 한다. 이건 아닌데 싶었다. 세상 그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주는 이 친구는 이대로 이렇게 있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을 편하게 느끼는 친구들은 많다며, 여자친구로 만나는 것이 아니면 본인은 나처럼 편하게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그 아이를 잃고 싶지 않은 생각에 덜컥 사귀기로 했다.

르샤 흰 소파 위에서 처음 만나 반년을 보내고, 이번에는 파란 소파 위였다. 옆으로 보이는 통유리창 너머 눈이 많이도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 잘 사귀어 행복한 시절을 보냈을까? NO!


파란 소파에서 한 언약은 3일 만에 끝이 났다. 편안함에 대한 갈구보다 멋진 남친을 향한 로망이 컸던 나이였다. 당시 가수 김창렬 같은 마초 스타일을 좋아하던 나는 '나, 반듯해. 나, 모범생.'이라는 이미지가 딱인 그 아이가 남자 친구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엄정화의 쟁반춤을 그 아이가 춰버린 것이 결정타였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를 외치며-물론 마음속으로- 내가 이별을 선언한 것이다. 그 후 그 겨울이 지나기 전에 그 아이는 군대를 갔다.



  

그리고 일 년 하고도 수개월이 더 지난 여름. 나는 여름 방학 중에 듣는 여름 학기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서 캠퍼스 내 붉은 광장을 지나며 절친인 S에게 지난밤 꿈얘기를 하고 있었다.


    S야, 내가 글쎄 어제 무슨 꿈을 꾼 줄 알아?
꿈에 그 아이가 나온 거 있지!
갑자기 꿈에 그 아이가 나와서 깜짝 놀랐잖아.
잠을 깨서도 기분이 묘하더라니까.
꿈에서 휴가 나왔다고 전화가 온 거야.
그러면서 만나자고 하더라.
그게 말야, 꿈이 너무 생생해서 이상했어.
그래서 만나러 가려고 하는데
계속 길이 엇갈리는 느낌이더라고.
나도 보고 싶어서 막 헤매다 깼잖아!










S에게 여기까지 얘기를 하고 있는데, 당시 시티폰(핸드폰의 전신)으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잘 지냈어? 나야. 휴가 나와서 연락했어. 한 번 만나자."

그 아이였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순간 S와 나는 소름, 닭살, 놀람, 땡그래진 눈 등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놀람 지수를 경험했다.


꿈과 달리 나와 그 아이는 길이 엇갈리지 않고 잘 만났고, 그 후 세상에서 가장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 시절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설명할 길이 없지만,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만나야만 하는,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던 걸까. 이 만남이 운명이라면 우리가 좋은 인연일까 악연일까. 아직은 답할 수 없다. 그 만남은 현재 진행형이기에.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이다가 악연이다가. 다시 서로를 성장시키는 관계이다가 지지고 볶다가. 그러다가도 서로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안식처로 지내고 있다.

유토피아. 그곳은 존재하는 곳일까, 만들어가는 곳일까. 그 답은 좀 더 살아본 후에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인생도, 우리도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니까.




#꿈 #운명 #인연 #라라크루 #예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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