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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사 Dec 22. 2023

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진심으로 내 마음을 보겠다는 결심

밝아졌다.


정말 많이 밝아졌다.



우울이 나인 줄 알았다. 20년 가까이 습관이 되어 버린 우울이란 감정과 한 덩어리였다. 그런데 요즘 나를 보면 정말 몰라보게 긍정적이고 밝아져 있었다. 지인들도 느끼고 나 스스로도 느낀다. 나를 관찰자로 바라보며 감정과 나를 분리시키는 연습을 약 4년 가까이해왔다. 마음공부의 함정에 많이 걸려 넘어지고 주저앉아 울기도 하고 드러누워 배 째라, 죽겠다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내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는 어떤 노력들을 했을까?




가면성 우울, 내 상태의 심각성을 느낀 것은 운전하다가 핸들을 꺾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을 때였다. 애써 밝은 척, 괜찮은 척을 하며 영어 강사로, 아이들 둘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 엄마 아빠의 딸, 다양한 역할들을 하며 살아온 것 같다. 모든 문제는 모름에서 출발했다. 나의 마음을 나도 모르고, 큰 게 올라와서 간신히 알아채면 또 표현하는 게 무섭다. 내 마음을 드러냈다가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면 더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아서이다.


특히 가족관계에서 이런 마음의 동요가 크게 일어났다. 남편의 직설적이고 자기중심적 말투가 나를 번번이 괴롭게 했으나 그 마음을 어떤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몰랐다. 용기를 내어 슬프고 우울했던 마음을 와르르, 하고 내뱉으면 남편은 그 마음이 뭔지 모르겠다며,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보, 나 요즘 너무 우울해."

이것도 1에서 10중에서 마음이 거의 9~10에 다다라야 간신히 나는 그 마음을 알아채고 털어놓았다.


그러며 남편은 이렇게 답을 했다.

"우울해? 근데 우울, 그게 뭐야? 진짜 미안한데

우울한 게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어, 설명해 주면 알아"


"ㅠㅠㅠㅠㅠ"

우울이 어떤 감정인지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나는 남편이 내 기분을 먼저 척척 알아주고 그랬냐면서 얼마나 힘들었나면서 안아주고 위로해 주면 좋겠다. 무엇보다 내가 소중하지, 우리 여보 얼마나 힘들었냐며 이런 따뜻한 느낌을 원했던 것인데. 번번이 차갑고 딱딱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조언하려 드는 남편의 화법은 나의 아픈 마음에 전혀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은 감정기복이 거의 없다. 그냥 어떤 일이 있어 기분이 잠시 나빴다가 돌아올 뿐, 나처럼 이유도 모른 체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기복을 이해하기가 힘든 사람이었던 것이다

INFP와 ESTJ가 한 지붕아래 사는 비극이다. 각자가 극 INFP, 극 ESTJ라 타고난 성향이 정말 다르다. 더 비참해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내 마음의 병을 더 키워갔고 급기야는 사라지기 일보 직전의 위기에 처했다.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마음을 돌보고 치유하는 노력이 시작된 것 같다. 그 첫 번째는 글쓰기였다. 글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가듯 온갖 하고 싶은 말을 모닝페이지에 가득 쏟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글을 쓰며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눈물도 나고 욕도 막 쓰면서 하지 않을 행동들을 가득 허락하며 나는 조금 무겁던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이다.



그렇게 글을 써도 내 안에는 고인 마음의 찌꺼기가 많았나 보다. 3년을 넘게 그렇게 더 울고, 우울해서 죽을 것 같고, 아침부터 왜 눈을 떠서 이 고통스러운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할까 반문하는 시기가 지났다. 그럼에도 나 스스로를 놓지 않고 나는 글을 썼으며, 나를 만났다. 책을 읽고 필사를 했으며 마음에 울림을 주는 저자의 목소리를 등불 삼아서 어둡고 캄캄한 마음 지옥 터널을 서서히 빠져나왔다.


아직도 나에겐 책 속의 소중한 글들이 생명수가 되어 나를 살아 흐르게 한다. 그렇게 책을 읽고 나만의 마음을 쏟아내고, 필사를 하고 긍정확언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노트에 쓰지 못하는 날엔, 산길을 오르며 나무에, 하늘의 허공에 그렇게 나는 글을 썼다. 살아남기 위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지구별에 온 이유를 제대로 알기 위해 열심히도 존재했다.



'존재'. 나의 인생의 키워드는 바로 '존재'였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이렇게 여리고 유약한 모습으로 사라질 존재들이 왜 태어나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간단 말인가? 5년 전 아빠의 죽음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이 질문은 나에게 늘 의미를 묻고 답을 찾아가는 인생 여정에 큰 역할을 했다. 아빠의 인생 63년은 나에게 인간의 온갖 다양한 모습을 다 껴안아 가게 했다.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그 중간의 어느 애매모호한 마음까지도 다 담은 아빠의 생이 나를 진하게 울렸다.


마음을 돌본다는 것은 아픈 자신을 안아주는 일이다. 아픈 것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봐줘야 한다. 떠오르는 온갖 마음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 그저 봐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마음은 너무 추악해서 봐주기 싫을 것이다. 내가 그런 추악한 모습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다. 그러나 그 모습도 나이고 한없이 착하고 다정한 모습도 나이다. 그 양면성을 다 받아주면 더 이상 그 마음은 나를 지배하지 않는다.


"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제 내 마음이 너무나 잘 보여."



내 마음을 잘 보게 된 것은, 내게 올라오는 마음에 분별을 하지 않기 시작하면서이다.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이다. 나쁘고 좋고 할 것이 없다. 재채기가 그냥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처럼 마음도 그냥 나라는 텅 빈 허공의 공간에 탁, 하고 떠오른 것뿐. 그뿐이다. 붙들지만 않으면 그냥 지나가는 하나의 구름 일 뿐이다.


"와, 이게 되네, " 기분 좋은 감탄문을 연발하며, 오늘은 정말 예전의 나처럼 힘든 지옥에 사는 마음에 가 닿아서 당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내 마음은 내가 아니다.

내 몸도 내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의식이다.

하나의 알아차림이다. 나는 나의 마음, 생각에

옳고 그름이라는 분별의 딱지를 붙이지 않는다.

그 어떤 마음이 올라와도 괜찮다.

나는 점점 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는 존재만으로 충분히 소중하다

나는 더 좋은 일이 내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냥 안다.

나는 결국 자유롭고 풍요롭게 지구별을 여행하며,

계속해서 성장하고 타인에게 기여하고 공헌하는 삶을

멋지게 살다 갈 것이라는 것을 안다.

어느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지금도 이미 풍요롭다.




이런 마음들이 내 안에 무의식으로 자리 잡기까지 많은 글을 쓰고 확언하고 말로 외치면서 여기까지 왔다.

나만의 확언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가장 나의 마음을 울리게 할 그 문장을 찾아서 말이다. 쓰는 대로 되고 믿는 대로 삶은 펼쳐진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진심으로  내 마음을 보겠다는 결심만 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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