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고?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깨송편, 콩송편, 팥송편 등 다 좋아하는데 그중 깨소를 제일 좋아한다. 소갈비, 돼지갈비 둘 다 좋아해서 매년 명절에는 꼭 갈비찜을 잔뜩 해서 맛있게 먹고 어머님께도 드리는데 그 맛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매년 명절에 또 아이들의 생일에 만든 약밥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일에 무슨 약밥이냐고? 두 아이의 생일이 크리스마스 무렵이다. 그 시즌의 케이크는 크리스마스를 겨냥해서 미리 만들어둔 냉동제품으로 만든다고 하여 12월이 생일인 아이들을 위해 생일케이크 대신 매년 약밥을 만들었다. 큰 대접에 약밥을 넣고 눌러서 담고 거꾸로 빼면 동그랗고 까만 초콜릿케이크처럼 보인다. 10년 넘도록 초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해주었는데 요즘엔 명절에만 가끔 만든다. (글을 쓰면서 알려주니 엄마의 깊은 뜻과 정성을 이제야 알았단다. 생일에 먹은 기억이 난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렇게 명절 음식을 즐겼는데 전혀 생각이 없는 게 신기했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 오래전 처음 유럽, 파리의 땅을 밟았던 것이 생각나면서 감격했다. 놀라운 건 체구가 큰 서양인들을 보면서 나 홀로 다니는데도 주눅 들지 않았고 마치 거기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랏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현지인 같이 편안한 느낌이라니.
게다가 놀라운 건 바로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 Zero.
현지 음식을 주문할 때 고민 없이 주문하고 맛있게 먹는다는 거였다. 주문할 때 현지 전통 음식으로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은 매우 반갑고도 기뻐하면서 알려주었다.
포르투갈의 호스텔에서 만난 한국인이 곧 출국한다면서 남은 라면, 햇반을 주겠다고 했다. 나의 대답은 No Thanks. 한국에서라면 “네!”. 하고 챙기겠지만 현지 음식을 먹고 싶은 나에게 한국 음식은 짐이 될 터였다. 심지어 마드리드 호스텔에서 알게 된 한국 청년이 옆에서 라면국물을 후루룩후루룩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위장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음식이 먹고 싶으면 찾아보라고 추천받은 아시아 음식인 일식, 중식, 케밥 심지어는 스파게티, 피자까지 먹지 않고 잘 지낸다.
해외여행 특성상 요일, 날짜 가는 걸 모르기 때문에 명절이 인지가 되지 않았기에 음식도 먹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일 이민자였다면 고국에 대한 다른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자이고 돌아갈 날이 정해져 있으니까 철저히 그곳에 집중했다. 유럽 현지음식은 유럽에서만 먹을 수 있으니까 소중했다. 이 맛을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검색도 해봤다. 결론은 '먹기 어렵다'였다. 스페인의 음식이 한국식으로 바뀌어서 더 달거나 다른 맛이 추가되니 비슷할 순 있어도 현지의 ‘바로 이 맛이구나’는 없는 거였다. 그게 안타까워서 먹을 수 있을 때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 추석에 예상치 못하게 명절음식을 먹게 된다.
스페인의 론다에서 일이다. 투우로 유명한 론다는 투우에 관련된 소재들이 많았지만 도착한 날은 휴무이기도 했고 피 보는 것을 무서워해서 투우가 스페인의 문화라고 해도 고개를 돌릴 소재였다. 투우의 고장이니 전통 음식은 바로 소꼬리찜. 소꼬리찜이 맛있다고 들어서 맛집을 꼭 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휴무였다. 이튿날 운영한다고 하여 여행 일정을 늦춰서라도 최고의 맛집을 갈까 싶었지만 다음 기회에 방문하기로(정말 또 올 거지?) 하고 두 번째 맛집에 간다. 다행스럽게도 사람이 북적북적한 모습이 맛집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도대체 소꼬리찜의 양이 얼마나 많을까 싶었는데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었던 건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커다란 접시의 검정고기와 씨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설마 저렇게 고기만 많이 나온다고? 야채샐러드도 없이?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다. 달랑 고기만 가득 나왔다. 곁들여서 나온 감자튀김이 전부였다. 1인분만 주문하고 싶은데 메뉴에 없어서 통째로 시켜야 했다.
18유로인가? 20유로? 가격도 높았다. 맛은? 토마토소스로 만들었다지만 뭔가 어디에서 먹어본 듯한 맛이었다. 그렇다. 모양도 비슷했다. 바로 한국의 갈비찜. 한국의 갈비찜보다 부드럽고 다른 게 있다면 갈비찜은 단맛 짠맛인데 이건 알맞게 짭짤했다. 스페인 식당에는 커피를 마실 때 넣을 수 있도록 식탁 위에 설탕이 항상 놓여 있다. 웨이터가 보지 않을 때 설탕봉지를 재빨리 뜯어서 커피가 아닌 갈비에 투하했다.
와핫. 아쉽게도 그가 봐 버렸다. 허연 가루가 소꼬리찜 주위에 흐트러졌다.
미안해요. 그대들의 입맛도 괜찮은데 오늘은 익숙한 맛을 먹어보려 해요. 어쩌겠나. 이미 뿌린 건데.
한입 베어 물었더니 세상에 갑자기 한국의 갈비찜이 입에 들어왔다. 낯선 스페인에서 그것도 추석명절에 반가운 맛을 먹으니 기분이 묘했다. 분명 한국음식이 그립지 않았는데 뱃속이 꿀렁꿀렁 춤을 추는 게 느껴졌다. 행복했다. 오묘하게도 명절이 겹쳐 신기했다. 한국의 명절날 스페인에서 그것도 투우 전통지에서 먹는 소꼬리찜과 한국요리와 유사성과 다름의 차이에서 흥이 올랐다. 그래서인지 아주 작고 귀여운 햄버거(타파스용/ 한국표현으로 안주? 정도 되시겠다)가 옆테이블에서 나를 불렀다. 그래, 너를 먹어줄게. 햄버거를 추가 주문하니 웨이터가 급방긋 미소를 짓는다. 너무 바쁜 상황이어서 얼굴이 무표정했는데 어떻게 그런 급미소가 지어질 수 있지? 남은 양은 약속대로 포장해 주었다. 포장된 음식을 보며 호텔은 데울 수가 없는데 이곳에 다시 오면 데워주겠냐고 물으니 가능하다고 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레스토랑을 나온다. 나중에 레스토랑을 방문했는데 정말 데워주었다. 감자튀김까지 서비스로 얹어주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가장 먹고 싶었던 건 집밥과 떡볶이였다. 집밥이라는 단어는 왠지 친정엄마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어머니의 치매로 인해 손맛은 오래전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기에 내가 만든 밥 =집밥이다. 식탁 위에 직접 만든 소박한 집밥이 너무 맛있었다. 여행기간동안 주로호스텔에 묵어서 먹기 어려웠던 반숙 계란프라이까지 얹어서 한입 가득 먹는다. 너를 만나다니. 노른자와 함께 즐거움이 입안에 퍼진다. 중소기업 소스로 만든 떡볶이와 위에 얹은 치즈는 꿀맛이었다. 그렇게한국에서의 식탁에 적응하면서 놀란 건 세상에나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아, 뭐가? 유럽에서 먹은 음식이 말이야. 그립지 않았다.
- 아, 프란세지나가 먹고 싶은데 이젠 못 먹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아….난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구나. 절대 자랑할 일이 아니구나. 난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구나 신께서 이렇게 만드셨구나. 현실에 충실하도록 말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부모님, 선생님을 욕할 때 마음껏 맞장구를 치지 못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기억이 맞다면 회사에서 동료들이 상사를 험담할 때도 험담의 내용은 인정했지만 말로 내뱉지 않았다. 음….성희롱을 한 상사는 욕한 것 같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즐기고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월요병도 없었다. 심지어 학생들이 보고 싶어서 월요일이 기다려졌고 방학이 끝나면 기뻐했다.
그런 나에 대해 겸손하지 못했고 잘 났다고 생각했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인 거다. 신이 사람의 특성을 다양하게 만드셨는데 그중 하나인 사람이다. 자랑할 이유가 없다. 여행이 나를 알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