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악몽에 시달린다. 땅이 무너지고 엄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있다. 엄마가 떨어진다. 아이는 꿈에서 깨어난다. 반복되는 악몽으로 아이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아니, 아이의 삶에 휴식이란 원래 없었는지도 모른다. 불치병에 걸린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아이는 12살 소년이 누려야 할 삶과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아간다. 안부를 묻는 어른들에게 "괜찮다"라는 대답만을 반복하던 아이에게 어느 날, 몬스터가 찾아온다. 몬스터는 아이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네 번째에는 아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이야기 따윈 아무래도 좋다며 거절하는 소년을 향해 몬스터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환상적이기도, 현실적이기도 한 세 가지 이야기를 지나고 마침내 소년의 차례가 되어 소년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죽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다던 아이는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성공한다.
12살짜리 소년이 감당하기에 그의 삶은 고달팠다. 가사를 도맡아 했고, 엄마의 병수발도 들어야 했다. 학교에서는 엄마를 대머리라고 놀리는 무리들에게 괴롭힘도 당해야 했다. 아이는 끝을 갈구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의 끝이 나길 원했다. 해소되지 않은 욕구는 폭력으로 불완전 연소된다. 몬스터의 환상적이기도, 현실적이기도 한 이야기는 소년의 폭력적인 성향을 부추기는 기폭제이기도 했다. 소년의 폭력은 실현되지만, 누구도 아이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벌을 내리지 않는다. 아이는 벌을 갈구했다. 처벌을 받으면 권선징악의 가치가 실현되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날 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삶은 계속 되고 있다.
몬스터는 아이에게 ‘너를 구해주기 위해 왔다’고 얘기한다. 아이는 소리친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한 가지, 엄마가 낫는 것뿐 이었다며. 그런 소년이 시작한 자신의 이야기.
다 끝났으면 좋겠어!
그토록 거부했던 스스로의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아이는 갈구하던 벌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형태의 결말을 맞는다. 때로 상처는 그것을 마주하는 것에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의 어두운 부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어렵고 무서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것을 인정했을 때 문제가 즉각 해결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스스로의 문제를 부정하고 피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몬스터는 아이를 구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소년의 진심을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아이를 구했다. 환상 속의 존재인 몬스터는 굉장한 힘을 갖고 있는 존재지만, 현실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가 한 일은 그저 이야기를 하도록 만든 것뿐이다. 그로 인해 소년은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마주할 수 있었고, 엄마에게 진심을 말하면서 보내줄 수 있게 되었다. 삶의 마지막을 예감하며 자신의 아들을 걱정한 엄마의 소망과 망가져가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소년의 무의식이 몬스터를 부른 것은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며 이야기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