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라는 되직한 크림을 주걱으로 깊게 휘젓는 느낌이었다.
어떤 느낌일까? 마음을 깊게 휘젓는 느낌. 그냥 마음이 아니라 되직한 마음을, 그냥 휘젓는 게 아니라 깊게 휘젓는 느낌. 되직한 마음은 한 동안 자극이 없었기에 꾸덕하게 뭉쳐있었을 것이다. 깊게 휘저었기에 그 마음은 요동치고 있을 것이다. 휘저어진 마음은 그 사람에게 생경한 감정을 선사했을 것이다. 그 감정이 그를 움직였을 것이다.
김영하의 단편 소설집 ‘오직 두 사람’에 수록되어 있는 ‘인생의 원점’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서진은 인아를 자기 인생의 원점이라고 여긴다. 그의 사랑은 진심이었고, 인아 역시 서진을 인생의 원점으로 여기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인아를 폭행하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분노 역시 진심이었다. 하지만 남편으로부터 인아를 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불륜이기는 하나 그 감정은 진실한 것이었다. 진실한 감정이었으나 그 감정이 둘을 구원해주지는 못하였다.
둘의 감정의 시작이자 두 사람의 만남의 시작에 저 문장이 놓여있다. 소년이었던 서진이 소녀였던 인아를 만났을 때 느낀 감정. 설렘이다.
서진의 설렘을 바라보며 내가 느꼈던 설렘을 생각해본다. 그 사람과의 첫 데이트가 떠오른다. 전역한지 얼마 안됐을 무렵이었다. 약속 장소는 북서울꿈의 숲. 우리는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공원을 걸었다. 늦봄이었다. 벚꽃의 만개 시기가 지나서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게 좋았다. 둘의 웃음소리가 겹치는 시간이 좋았다. 그 사람은 쾌활하고, 배려있는 사람이었다. 첫 데이트가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에 나는 그 사람과의 다음을 벌써 기대하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사랑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라고 정의했다. 자신이 더욱 완전해지는 기쁨을 타인으로부터 얻을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의 시작, 설렘은 그것을 미리 겪는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저 사람이 나의 ‘인생의 원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설렘을 마음을 깊게 휘젓는 느낌이라고 작가는 표현했을 것이다. 서진이 그랬고, 나도 그랬다.
설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은 진실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진실한 감정도 삶을 구원하지는 못하고, 모든 평범한 연애가 그렇듯 나의 연애도 끝나는 순간이 있었다. 그렇다면, 감정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하느냐는 질문은 부디 하지 않기를.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감정에도 끝이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순간 느낀 설렘이 아직 나에게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나는 또다른 설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