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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아리 Dec 25. 2020

이층 침대

새벽 두 시 콜폰 소리에 잠에서 깼다.

ㅡ 네 선생님...

ㅡ 선생님 말씀하신 섬망 검사할 수술 환자, 병실 올라가기 전에 연락드렸어요.

ㅡ 네 알겠습니다. 갈게요.

연구를 위해 수술이 끝난 환자의 섬망 검사를 해야 했다. 보통 섬망이라 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헛것을 보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등의 혼돈 증상을 떠올린다. 하지만 보이는 섬망보다 증상을 알 수 없는 섬망이 더 많다. 그런 경우, '1kg이 2kg보다 무겁나요?'와 같은 복잡한 질문에 적절한 반응을 하지 못하고 심할 경우 이름이나 날짜를 물어도 평온한 얼굴로 이상한 대답을 한다. 환자의 수술 후 관리에서 섬망이 종종 무시되곤 하는데, 고령 환자는 수술 후 섬망이 자주 발생하고 사망률이나 치매 발병, 재원 기간 증가 등과 관련이 있으므로 적절한 관리가 필요하다.


불이 절반만 켜진 회복실에 여러 침대가 놓여있는 광경은 몇 년을 봐도 음산한 느낌이 난다. 낮에 쓰던 여러 기계들과 수액걸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어두운 구석에 몰려있다. 반대편 힘을 잃은 몇몇 조명 아래 방금 십이지장과 췌장을 떼어낸 환자가 누워있다. 환자의 머리맡에서 높은 톤의 날카로운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들렸다. 침대에 누워 눈을 껌뻑껌뻑하는 고령 남자 환자의 산소 포화도와 맥박, 혈압은 정상이었고 기분도 썩 괜찮아 보였다.

나는 환자의 귀 가까이에 대고 크게 외쳤다.

"이름이 뭐예요?"

"이.기.성."

"제 손 꼬옥 잡아보실 수 있으세요?"

환자는 내 손을 아주 꽈악 붙잡았다. 환자의 인지기능은 정상이었다. 설마 아무리 고령에 수술도 크고 피도 많이 났지만 굳이 내가 한밤중에 일어나서 직접 환자의 섬망 상태를 살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환자는 괜찮으니 잠이나 마저 자야겠다는 생각에 돌아서려는데,


환자가 힘 있게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내가 놓으라고 말해도 환자는 잡은 내 손을 풀지 않았다. 반 즈음 돌아선 내 몸을 다시 돌려 허리를 굽히고 환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평온하다고 느꼈던 환자의 얼굴 어딘가에서 멍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기성 님, 돌이 물에 뜨나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환자는 5초가량 머뭇거리더니 힘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바다에 코끼리가 사냐고 물어도 반응이 똑같았다. 새 사진을 보여주니 몇 초 후에 가늘게 숟가락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섬망이었다.


환자가 소리를 지르지 않고 혼돈 속에 조용히 갇혀 있으면 섬망을 쉽게 발견할 수 없다. 일단 통증을 평가하고 진통제를 처방했다. 그리고 병실로 환자를 인계할 간호사 선생님께 적절히 자극을 줄 것과 섬망 관련 내용을 잘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어쨌든 섬망을 나아지게 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회복실에서는 30분가량 환자를 지켜보면서 숨을 잘 쉬는지, 심장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지 등 생명과 직결되는 증상만을 확인하고 급성 통증을 조절할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환자를 위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환자에게 친숙한 환경을 만들고 잠을 잘 재우고 약을 쓰는 등 섬망에 대한 이후 처치는 환자의 주치의와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할 것이다.


돌아와서 자리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는다. 침대가 작다. 오른손으로 콘크리트 벽의 싸늘함이, 오른발로 이층 침대를 지지하는 쇠봉의 차가움이 느껴진다. 머리카락은 팔보다 두꺼운 전공책인지 침대 윗판인지 모를 것에 닿아 두피가 간질간질하다. 조절할 수 없는 구식 라디에이터에서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풍겨 나온다. 목에서 땀이 스며 나지만 목구멍은 바싹 말라간다.


계속 뒤척이다가 일찍 잠들기를 포기했다. 섬망의 기전, 치료, 예후에 대해 머릿속으로 다시 생각해본다. 지금 기억나는 지식이 수술 후 섬망에 대한 것인지 중환자실 섬망에 대한 것인지 헷갈린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보게 될 때 섬망 환자에게 어떤 처치를 해야 하는지 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멍청한 내 머리에 한숨이 나오지만, 공부는 내일 해야겠다. 지금은 할 수 없다. 언제 울릴지 모르는 콜폰, 잠을 깨우고 밤을 새우게 할 수술이 생기는 것이 두려워서 머릿속으로 별 생각이 다 난다. 피곤해서 넋이 나간 것 같은데도 생각은 점점 명료해져만 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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