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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아리 Dec 11. 2021

수술한 후에

곧 전셋집에서 쫓겨나는데 일이 많았다. 한 달 동안 당직이 열한 개였고, 매 주말 당직을 섰다. 매일 퇴근을 하면 저녁밥도 못 먹은 채 부동산을 떠돌아다녔다. 한동안 계속 쓰던 글은 멈췄고 전공의 평가는 망했고 체중은 계속 줄어만 갔다.


수술방에서 밤을 새웠다. 수술이 끝나니 이미 날이 밝아서 갓 출근한 사람들과 새로운 날의 수술을 시작했다. 그렇게 오후 어드메 즈음 퇴근했다. 매일마다 낯선 광복을 맞이하여 축하 거리를 고민하던 태양 아래에서 이제는 집 없이 거리에 나뒹굴지도 모른다는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처럼 밤을 새운 날이면 뇌 측두엽 상방 30cm 정도 떨어진 허공에서 스카치 사탕 껍질이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든다. 내 발은 며칠 동안 주머니에서 잊혀 녹아버린 사탕처럼 바닥에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고 찐득했다. 코 끝에 그 사탕 고린 냄새가 들러붙는다. 그래서 내 뇌를, 발을, 코를 잘라내고 싶어 진다. 내가 왜 이 지경이 된 건지 주변 아무 사물, 공기에다가 시비를 걸고 싶은 기분으로 부어 터진 발을 질질 끌고 부동산으로 향했다.


나도 사람다운 집에서 살고 싶다. 오래된 곰팡이, 누런 벽지, 구식 창틀 따위의 생존을 향한 치열한 흔적은 매일 병원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사투의 기억을 불러온다. 원룸은 아무리 깨끗하고 넓어도 짐승 우리일 뿐이다. 그래서 신축, 투룸을 구하고 싶지만 그런 것들은 아주 비싸다. 무엇보다 전세가 필요했다. 대출을 이용하면 목돈 없이도 월세보다 훨씬 싼 이자를 내고 좋은 집에 살 수 있다. 하지만 부동산 정책이 오락가락하면서 전세 같은 건 씨가 말라 찾을 수 조차 없다.


오늘 본 빌라는 꽤 훌륭했다. 네이버 지도에 갑자기 등장했는데 연남동 기찻길 바로 뒤쪽 고층이라 병원과도 가깝고 뷰도 좋았다. 게다가 지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인테리어도 예쁘고 방도 두 개에 화장실도 넓었다. 하지만 집을 다 보고 나서야 입주 날짜가 6개월 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 집도 내 집이 아닌 것이다. 이 새끼는 왜 이제야 이 이야기를 하는 건지 주먹으로 뺨을 후려갈길까 하다 말았다. 한 시간을 졸며 기다려 집을 봤는데 결국 허탕이었다. 다른 부동산 문을 빼꼼 열어 신축 투룸 전세를 외치고 매물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부동산에 가서 신축 투룸 전세를 외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다음 부동산 위치를 확인하려고 꺼낸 핸드폰을 쥔 손이 시리다. 다리가 또다시 바닥에 엉겨 붙는다. 일하는 동안 하루 넘게 신었던 크록스는 발바닥부터 발목과 종아리까지 뻐근하고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허벅지 뒤쪽 햄스트링까지 꽈배기처럼 꼬인 채 해가 진 거리를 되짚어 집으로 향했다.


이미 세 달 넘게 많은 집을 보았다. 근방에 내가 원하는 집이 있을 확률이 희박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혹시나 네이버도, 직방도, 다방도 모르는 매물이 있을까 봐 오늘도 부동산을 샅샅이 뒤진다. 하지만 그런 건 정말 희소하다. 담배 냄새나는 어떤 부동산의 할아버지는 요즈음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핀잔을 줬다. 나도 알고 있다고 매섭게 쏘아붙이려다가 참았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 가뜩이나 말랑하고 연약해진 자아가 흔들거린다. 주변에 몇 개의 오피스텔이 스쳐가고, 고개를 들면 커다란 새 아파트 단지가 펼쳐졌다. 이렇게 집이 많은데 내가 살 곳이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따뜻한 마을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도 오늘 본 집은 다음 매물이 나오면 주저하지 말고 사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씨발' 하고 욕을 뱉었다. 춥고 배고프고 졸린데 왜 이런 짓을 계속해야 할까. 이 짓을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 몰랐고, 이제는 한 달 안에 집을 구해야만 한다.


어느새 침을 질질 흘리고 자다 잠결에 받은 전화에서 친구가 대뜸 내게 쏘아붙였다.

"집 고르는 거 보니 네가 왜 연애를 못하는지 알겠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을 올라가면서 왠지 눈물이 질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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