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 윤 Sep 27. 2021

가치 없는 경험은 없다

그것이 설령 이혼일지라도.

아무리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의 사람이라도 감당할 수 없이 큰 일을 겪게 되면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가 무척 어렵기 마련일 것이다. 나에겐 이혼이 그러했고 때문에 긴 시간 우울감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 이혼 스트레스를 겪다 알게 된 사실인데 미국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스트레스 지수 중 1위가 배우자의 사망, 2위가 이혼이라고 한다. (3위는 별거, 4위는 가족의 죽음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엔 순위가 조금 다르긴 했으나 여전히 이혼 스트레스는 상위권에 머물러 있을 만큼 당사자에게 매우 큰 심리적 고통을 유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접한 뒤 나는,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안심이 되었던 적이 있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 모두가 힘들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도 이런 과정을 겪었을 거란 마음이 겹쳐져 어쩐지 마음에 위로가 되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극복했지? 난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거지?라는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내 비극적인 현실에 짓눌려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어 더 괴롭기도 했다.



이혼 과정을 겪을 땐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진부한 말속엔 아주 타당한 진리가 숨어있음을 몸소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경험한 것을 고백하건대, 수술은 3일까지가 제일 아프고, 심리적 스트레스는 3년까지가 괴로운 것 같다.

수술 부위는 3일이 지나자 견딜만해졌고, 이혼의 상처는 3년이 지나자 마음의 통증이 좀 가라앉았다. 하지만 병실에서 그 3일을 버티기 위해 진통제를 맞아야 하고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아픔에 비명을 지르던 것처럼,  이혼 후 3년의 시간 동안 작은 일에도 상처 받고 울던 과정이 필요했음은 이루 말할 것도 없다.


이혼 스트레스로 인해 긴 시간 혼자 싸우다가 정작 극작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난 이 상담에서 결국 내 극작일, 이혼일까지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몇 차례의 상담이 끝나고 마지막 상담에서 선생님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으며 내 생각이 많이 났다면서 책의 몇몇 구절을 함께 읽고 저자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정신 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몇 번의 사랑을 겪으며 상실과 극복을 마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50년 전에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을 출간했을 때, 그는 '사랑'과 '사랑의 능력'이라는 주제로 책을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학자였다.        

    <사랑의 기술> 중 에리히 프롬의 삶과 사랑/라이너 풍크

 

그는 총 세 번의 결혼을 했고 그중 첫 번째는 이혼, 두 번째 부인과는 사별을 겪었는데, 그의 세 번째 결혼은 두 번째 부인의 사별을 위로해주던 뉴욕의 사업가 애니스 프리먼과 이루어진 것이었다. 프롬은 그녀와의 사랑을 통해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벗어나 《사랑의 기술》을 저술하였고 결국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인간 실존의 모든 고난에 단 하나의 만족할 만한 해답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모든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해답을 사랑이라고 말했다.

나는 선생님과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깊고도 넓은 생각을 가진 그의 일생이 무척 궁금해졌다.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의 일생을 차례로 설명해주셨고 이에 나는 비로소 프롬의 책 속 문구들이 얼마나 많은 자아성찰과 고통, 괴로움 속에서 탄생한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인간의 스트레스 지수 중 1위라는 배우자의 사망과 2위인 이혼을 모두 겪은 프롬. 그는 그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통해 이를 극복했고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프롬이 다시 사랑하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겪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가 책에서 말하는 인류애적 사랑은 자신의 이혼과 사별을 통한 상실과 고통 속에서 발견한 깊고 넓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가장 높은 경지의 진리였다.


내가 이혼 과정을 겪고 난 뒤 변화한 것이 몇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큰 하나는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전보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한 번 더 고민해서 말하고 행동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내 이혼의 반작용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상처 받았던 내가, 그 상처를 겪었기에 엮으로 다른 사람에게 더 조심하고 배려하려 애쓰게 된 것이다. 즉, 배려받고 싶은 마음이 내가 상대를 배려하게끔 만들게 된 발단이었다.

 예를 들자면 작은 일로는 생일 선물을 고르는 방식도 조금 바뀌었다. 예전엔 친구의 생일에 내가 써서 좋았던 물건을 선물하곤 했는데 이혼 후에는 생각이 바뀌어  그 사람을 위한 선물을 '나'의 기준으로 고른다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기뻐할 만한 물건을 선물하기 위해 그 '사람'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A라는 사람이 평소에 무엇을 좋아하고 어딜 가는지, 무엇에 가장 관심 있는지 골똘히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만을 위한 맞춤 선물을 정하고 고르고 골라 전달해 줄 때의 기쁨은 예전과 또 다른 기쁨이 있었다. 나의 입장이 아닌, 받는 이의 취향과 기쁨을 떠올리며 몰두하는 일. 그 사람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자체에서 오는 기쁨.


일상생활에서도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이 커졌다. 내 물을 뜰 때는 자연스레 상대방의 물도 떠오되, 그 친구는 추위를 많이 타니까 따듯한 물을 따로 받아온다던가 하는, 작은 것들이지만 스스로도 내적 변화에 대해 신기하고 당황스러울 만큼 어떤 의식도 없이 자연스레 벌어진 일들이었다.

프롬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이것은 상처를 겪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반사적 행동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천재요 이 사람은- 라고 말씀하셨지만 나의 경우엔, 그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쉽게 말하면 사랑에 통달한 인류애 넘치는 성인군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었을까 라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그가 사랑에 대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으로 사랑에 대한 고통과 상실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혼자 소설도 쓰고 이런저런 글을 끄적이던 나였지만 이혼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좀 더 '인간'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글을 쓸 때 나는 사람의 내면에 들어가 그 사람을 움직이는 마음속 생각들을 끄집어 내 대본에 적으려고 깊게 고민하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이혼 후에 작가를 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내가 드라마를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잘은 몰랐지만 스스로가 삶에 대한 경험이 적었던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모양이다. 반면, 이혼이란 과정을 겪으며 나는 예전보다 깊어진 삶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고 사람에 대한 생각, 관심, 통찰이 생겨났다. 아마 내가 극작을 시작할 용기를 갖게 된 것이 은연중에 이혼을 통해서 내 경험과 생각이 늘어났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나도 드라마를 쓸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고통스럽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다 마침내 그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마음 더 크고, 깊고, 넓어진다. 상처가 만들어낸 마음의 깊이는 잘 다듬어지고 안전하게 굳어져 새롭게 마음의 넓이를 넓히고 내 마음의 일부분으로 생겨나 자리 잡았다.

이혼이라는 일이 인생에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얻어지는 것도 분명히 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으로 고통스럽더라도 그 고통을 이겨내면 내면은 분명히 더 단단해지고 넓어진다.  작은 일에도 감사함과 귀함, 행복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순간이 분명 오고 나라는 사람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적으로 성장 한다.  마치 프롬이 아픔을 겪으며 겪은 내적 성장을 통해 '사랑의 기술'을 쓴 것처럼 이혼의 아픔은 성숙함과 깨달음을 안겨주기도 한다. 경험자로서 말하건대, 이것이 이혼이 주는 단 하나의 긍정적 작용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슨 경험이든 간에 가치 없는 경험은 없다.  그것이 비록 그토록 불행한 '이혼'이더라도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