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애플
나의 첫 MP3이자, 나의 첫 아이팟이었던 클래식 5세대. 일명 '우유팟'이다. 나는 비디오팟이라 불렀다.
사실 내가 산 건 아니고, 친구에게 물려받았다. 화면이 반쯤 깨져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고, 뒷면에 기스가 많아 사용감이 상당했지만 상관없었다. 나에게 아이팟을 넘겨준 현이는 다른 MP3를 샀고, 나는 비디오팟에 정말 많은 노래를 담았다. 그 전에는 작고 소중한 용량을 가진 핸드폰에 노래를 넣어 다녀서 베스트 5* 정도만 추려 들었는데, 아이팟이 생겨 맘껏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비욘세의 <irreplaceable>, 라디오 헤드의 <creep>, 드렁큰타이거의 <편의점> 등
아이팟에 노래 넣는 법을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 MP3들은 컴퓨터에 연결한 후 폴더에 노래 파일을 넣으면 끝이었는데, 아이팟은 정말 귀찮았다. 아이튠즈를 깔고, 동기화를 하고, 수시로 백업을 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애플은 그 때나 지금이나 사용자들을 귀찮게 하는구나.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귀찮음을 받아들였다. 기분 좋게 돌아가는 휠,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 내가 바로 아이팟 오-너라는 자부심... 15살 소녀에게 아이팟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정말 어딜 가나 함께였다는 표현이 딱이다.
아직도 현이가 야생 그 자체였던 중학교 2학년 교실에서 안경을 끼고 영어로 된 간디 책을 읽던 게 생각난다. 나는 현이를 동경했는데, 평소에는 안경을 안 쓰고 수업 때만 안경을 쓰는 것도 멋있고, 흔쾌히 나에게 아이팟 클래식을 준 것도 고맙고, 또래들보다 3살은 더 성숙해 보이는 정신세계가 부러웠다.
중학교 시절 현이의 싸이월드를 구경하다가 '심장을 전자레인지에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따뜻해지게...'라는 글귀를 보고 다음 날 바로 현이 앞에서 저 문장을 읊조리며 놀린 적이 있었는데, 대꾸도 안 하고 인자하게 웃고만 있는 그를 보고 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일찌감치 인정했다. 내가 힙합이라면 그는 클래식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현이를 포함한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 한남동 다운타우너에 갔다. 현이는 그 자리에서 "결혼한다"고 했고,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현아, 드디어 너의 전자레인지를 찾았구나.
"내가 축가 불러줄게"
나에게 음악을 선물해준 현이에게 빚 갚을 타이밍이다. 비록 지금 내 입 안에는 수제버거가 가득하지만, 약속할게. 정말 진심으로 널 위해 노래를 불러볼게. 어디서도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지만, 허락해준다면 열심히 연습할게. 현이는 그때도 그저 날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역시 힙합은 클래식에게 안된다 이건가?
몇 개월 후, 현이에게 "아직도 축가 불러줄 마음이 있어?"라는 질문을 받았고, 내 대답은 HELL YES였다. 내 인생의 첫 축가 무대가 정해졌다. 핫데뷔 D-54. 이제 정말 코노뿐이야.
[핫데뷔 D-50] "현아, 엄정화의 '페스티벌' 어때?"
당연히 반려당했다.
축가를 고르면서, 내가 아는 현이를 떠올렸다. 우리는 15살 때 담임 선생님을 위해 축가를 불렀다. 현이는 지휘자였다. 그의 손 끝을 바라보며 축가를 연습하던 날과 내가 그를 위해 축가를 연습하는 날들이 마치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현이를 위해 축가를 누르게 된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핫데뷔 D-30]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코노(코인노래방)에 갔다. 지갑에 천 원짜리가 마를 날이 없었다. 가사를 외우기 위해 문을 보고 노래 부르기를 수십 번. 코노 안을 서성이는 사람들과 여러 번 눈이 마주쳤다.
[핫데뷔 D-7] 지나가다 누가 툭 치면 가사를 줄줄 외울 수 있었다. 고퀄 MR을 사고 싶었는데, 구하기가 어려워 인터넷에서 최대한 덜 노래방 반주 같은 걸 샀다. MR을 틀어놓고 연습했다.
[핫데뷔 D-Day] 현이의 아버님이 1부 축가를 맡으시고, 나는 2부 축가를 맡았다. 아버님은 직접 기타를 치시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가를 부르셨다. 처음에는 감동에 젖어 감상하다가, 문득 아버님 다음에 내가 축가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씩 나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아버님은 축가가 끝날 즈음에 눈물을 참기가 어려우셨는지 목 메인 목소리로 "현아, 사랑한다..."고 외치셨다.
아니, 인간적으로 저걸 어떻게 이겨요;;
...드디어 내 차례가 되고, 어쩐지 조금은 저렴하게 느껴지는 까랑까랑한 MR이 결혼식장에 울려 퍼졌다. 창피한 마음에 잠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진심이 통하길 바라며 나는 천천히 노래를 불렀다.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새들은 걱정 없이 아름다운 태양 속으로 음표가 되어 나네"
10년도 넘은 일이라 너는 까먹었을 수도 있지만, 네가 준 아이팟 덕분에 나는 정말 행복한 사춘기를 보냈다. 사랑이나 결혼,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나보다 3살은 더 성숙한 너는 그 어렵고 대단한 걸 먼저 해내는구나. 모든 가사를 까먹어도, 반드시 불러야 하는 소절이 있었다. 이 가사는 너무나 진심이어서, 노래보다는 차라리 너의 손을 잡고 말로 해주고 싶었다.
현이야, "행복해 줘 나를 위해서"
현이가 준 아이팟은 도둑맞았다. 예측되는 범인은 있었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도둑맞은 이후로 중고나라를 들락날락거렸지만 아무래도 상품가치가 없다고 판단됐는지 판매글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 후로 다양한 아이팟을 썼다. 아이팟 셔플 1세대(길에서 잃어버림), 아이팟 나노 3세대(집에서 잃어버림), 아이팟 나노 7세대(고장남)를 거쳐, 결국 2012년에 아이폰4S를 사면서 아이팟과는 완전히 이별하게 됐다.
바야흐로 스트리밍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아이튠즈로 노래를 하나하나 넣으라고 하면 와~ 나는 절대 못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시절의 손맛이 그리운 건 사실이다. 현이는 엄마가 됐다. 항상 현이를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전자레인지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기. 괜히 빗나가고 싶고, 반항심이 넘치는 철 없는 나와는 다르게 현이는 여전히 클래식하고 아름답다.
자우림의 <샤이닝>을 들으면서 놀이터 미끄럼틀에 大자로 누워 통곡하던 내 손에는 화면이 반쯤 나간 아이팟이 있었다. 아마, 나는 먼 훗날에 아이팟 클래식을 다시 살지도 모르겠다. 지금 듣는 노래들도 결국은 다 아이팟 클래식 덕분이다. 음악 편식이 심했던 나에게 자유함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래, 결심했다. 언젠간 다시 아이팟 클래식을 사게 되면 첫 곡으로는 꼭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을 듣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