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에 목숨 거는 MZ세대
무더운 여름날, 살인적인 더위에 지친 당신은 거리를 걷다 말고 눈에 띈 카페로 들어갔다. 음료를 시키려고 하는데, 메뉴판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점원에게 어떤 메뉴가 있는지 묻는다. 그러자 점원은 손바닥을 모으고 기계적으로 친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객님, 메뉴 문의는 DM으로 부탁드려요.”
인스타그램은 현대인의 대표적인 SNS가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30대 이하는 90% 이상 사용한다. 사실상 젊은 놈들은 죄다 쓴다고 보면 된다. MZ들은 연락처를 교환할 때 전화번호가 아니라 인스타 아이디를 묻는다. 전화, 문자, 카톡보다 인스타 DM으로 대화하는 게 훨씬 편하다. 하다 하다 이젠 DM으로만 주문받는 카페나 술집도 나타났다고 한다. 인스타그램은 MZ들의 삶 깊숙한 곳까지 자리 잡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인스타그램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기 보다는, 서로를 비교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20살이 되고 인스타그램을 깔았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헤어지면 연락이 뜸해질 게 뻔하니, 인스타라도 해서 생존신고를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인스타를 열었다. 어지러운 화면이 펼쳐졌다. 페이스북도 해본 적 없는 내게 익숙하지 않은 UI였다.
이것저것 만지다보니 연락처에 있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몇몇 친구들에게 DM이 오기도 했다. 네가 인스타를 하냐면서 친구는 놀라워했다. 친구들 사이에 나는 ‘SNS 안 하는 인간’으로 이미지가 박혀 있었다. 그런 내가 인스타에 가입해 친추를 보내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대화도 하고,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나는 대학생 때 아싸로 살았다. 술도 안 마시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집에 가는 것도 귀찮아해서 대부분 기숙사에 짱박혀 있었다. 부모님은 주말에 시간 되면 집에 오라고 재촉했지만, 안 갔다. 과제를 하거나 게임만 하는, 꽤나 지겨운 삶을 살았다.
스마트폰으로 인스타 피드를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별다른 목적이 없어도 생각없이 인스타를 켜서 쭉 피드를 내렸다. 인스타 피드는 내 삶과 완전히 달라 보였다. 모두 즐거운 새학기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술잔이 부딪치는 영상, 노래방에서 소리 지르는 스토리, 화려한 음식 사진이 쉬지 않고 올라왔다. 나는 멍청하게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내렸다.
시험이 끝난 주말이었다. 나는 집에 가기 귀찮아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었다. 습관처럼 인스타에 들어갔다. 피드를 내리자 사진 한 장이 나타났다. 한 선배가 고속버스에서 창문 밖을 찍은 사진이었다. 푸른 논밭이 펼쳐진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그 사진 아래에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오랜만에 집 간다’ 하는 말로 기억한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속절없이 부러웠다. 동시에 나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도 얼마든지 집에 갈 수 있으면서,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집에 안 가고 기숙사에 남아 있는 거면서, 집에 돌아가는 남을 보며 부러워하고 질투하다니.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허탈감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사진에서 10분 가까이 멈춰 있다가, 나는 곧바로 홈 화면으로 나가 인스타그램을 삭제했다.
우리는 내 손안의 작은 화면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쉽게 훔쳐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서로 비교하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에는 온갖 게시물이 올라온다. 일상적인 음식 사진부터 시작해 최근 유행하는 아기자기한 카페 사진, 친구들과 호캉스를 떠나 연 파티, 해외 유명 관광지에서 찍은 셀카, 명품 백과 옷, 차 사진까지. 빛나고 화려한 사진들이 피드에 수두룩하다.
우리는 SNS라는 작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하이라이트와 우리 삶의 비하인드를 비교한다. 그들이 유명한 해외 관광지에서 비싼 코스 요리를 먹는 동안 나는 초라한 단칸방에서 라면에 밥 말아먹는 처지를 비교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자존감에 상처 입고 우울에 빠진다. 어째서 저 사람은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나는 이렇게 초라하게 살고 있을까?
부모님 세대 때 평범한 사람은 상위 10퍼센트의 삶을 몰랐다. 어렴풋이 상상만 할 뿐, 그들이 평소에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SNS라는 것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재력을 SNS에 과시한다. 우리는 알고 싶지 않았음에도 알게 된다. 그들의 한 끼 식사가 나의 한두 달 월급과 맞먹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카페인 우울증’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2010년 중반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일상을 공유하는 SNS가 등장하며 만들어진 단어다. 말 그대로 SNS 때문에 우울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떤 설문조사에서 SNS를 하면서 우울감이나 박탈감을 느꼈다고 답한 비율이 40%나 되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도 아니다.
MZ들은 우울감에 시달리면서도, 왜 인스타를 계속하는 걸까? 인스타에 올릴 사진 하나를 위해 막대한 소비를 해가면서까지 말이다.
MZ들은 인스타에 과시하기 위해 큰돈을 쓴다. 통장 잔고를 보며 눈물을 머금으면서도 명품백을 결제하고, 새 차를 뽑고, 호캉스를 떠나고, 오마카세를 먹는다.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그중에 잘 나온 사진을 정성을 다해 보정해 인스타에 올린다. 그리고 그 게시물에 달린 좋아요와 댓글을 보며 위안한다. 내 소비가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하면서.
어른들은 말한다. MZ들이 괜한 허영심에 빠져서 과소비한다고. 그까짓 명품이 뭐라고 배를 쫄쫄 굶어가면서 구매한단 말인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돈을 펑펑 쓰는 그들의 소비 행태를 비판한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동의하는 바다. 그 돈이면 치킨이 몇 마리인데….
그러나 내가 젊은이들을 위해 소심하게 변명하고 싶다. 왜 MZ들이 SNS에 사진 하나 올리려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소비를 하는 걸까?
그건 바로 이제 우리 삶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단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웃어른께 공손히 인사했다고 칭찬받는 나이는 지났다. 왜 너는 남처럼 좋은 대학에 나오지 못했냐, 왜 여자친구가 없느냐, 왜 좋은 직장에 다니지 못하냐, 왜 결혼할 생각은 안 하냐 하며 우리의 삶이 성공한 삶과 비교당한다. 우리만 눈이 높아진 줄 알았는데, 어른들의 눈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래서 인스타 좋아요에 목매는 것이다. 그 작은 스마트폰 화면 안에서 찍히는 좋아요 개수를 통해 내 볼품없는 인생도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내 삶을 인정해주는 것은 없다.
현실의 내 삶은 구질구질하지만, 인스타 속 나는 얼마든지 꾸밀 수 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만 한 나를 꾸며내고 치장한다. 현실에서 충족시키지 못했던 인정욕구를 사람들이 눌러주는 좋아요로 채울 수 있다. 그래서 많은 MZ들이 빚을 내서 비싼 차를 사고, 명품을 몸에 두르며, 고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을 연출해 업로드한다.
인스타그램 세대는 인스타그램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인스타그램을 경계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인스타에 환장하면서 애인은 인스타를 안 했으면 바라는 걸 보면 참 모순적인 세대라는 생각도 든다. 작은 화면을 홀린 듯 바라보며 우울해하면서도 손가락을 멈추지 않는다. 인스타 세대의 슬픈 민낯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인정욕구. 그 초라하고 볼품없는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 MZ들은 오늘도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그런 우리 세대가 슬프게 느껴진다. 인정받을 수단이 인스타 좋아요 개수밖에 남지 않은 세대다.
스마트폰을 끄면 찾아오는 공허함의 정체를 우리는 모른다. 이 공허는 좋아요 알림으로도, 낯선 이의 DM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전시 당하고 비교당하기만 하는 우리의 삶은 인스타 속에 영원히 박제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