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시달리는 MZ세대
한국은 자살의 국가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2022년 한국의 우울증 진료 환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2024년에는 자살이 암을 제치고 4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되었다. 정부는 자살률을 낮추기 위한 정책을 꾸준히 시행해왔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어보인다.
한국의 우울증 환자 중 40%가 20대와 30대이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히는 은둔형 외톨이, 일명 ‘히키코모리’도 점점 늘고 있다. 한국 MZ세대의 정신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내가 처음 정신과에 찾아간 것은 20살 때였다. 옛날부터 내가 우울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있었지만, 겁이 나서 병원에 가지는 않았다. 20살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 되어야 용기가 났다.
꽤나 큰 종합병원이었다. 정신과는 1층 복도 구석에 있었다. 차가운 대리석 복도에 사람들이 대여섯 명 앉아 있었다. 나는 의자 끄트머리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은 진료실에 들어가고 5분도 안 되어서 나왔다. 그리고 진료실 오른편에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약봉투를 받고 떠났다. 패스트푸드 음식점보다 머무는 시간이 짧았다.
금방 내 차례가 되었다. 진료실에 들어갔다. 비쩍 마른 인상의 뿔테 안경을 쓴 젊은 의사가 있었다. 의자에 앉고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는 취조하듯이 이것저것 질문을 하더니 대뜸 내 우울의 원인이 수면 부족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 의사가 대체 어떤 근거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항우울제와 수면유도제를 처방해주고, 수면일지를 인쇄해줄 테니 매일 쓰라고 했다. 내 손에 두툼한 종이뭉치가 놓여졌다. 시간표가 그려진 그것은 마치 초등학교 방학숙제 프린트물 같았다.
“어릴 때 가정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남들이 경험해보지 못했을 특별한 일? 없었죠?”
의사는 내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말투로 말했다. 네 까짓 게 고생이라도 해봤겠냐고 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나는 그러한 의사의 태도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괜한 반발심이 들어 어릴 때 아빠가 엄마를 죽이려고 했던 적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보기 좋게 당황했지만,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우울증의 원인은 수면장애 때문이라는 주장을 굽히지는 않았다.
나는 수면일지를 제대로 쓰지 않았고, 몇 개월이 지나 통장에 돈이 다 떨어지자 더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아직도 그 의사의 표정이 생각난다. 날 심드렁하게 쳐다보던, 그 못생긴 망둥어 같이 생긴 얼굴을.
고등학생 때 기숙사 생활을 했다. 우리는 사감 몰래 한 방에 모여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번은 어떤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길래 나도 분위기에 취해 무심코 말했다. 내가 우울증인 거 같다고. 그러자 한 친구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야, 네가 무슨 우울증이야. 다 힘들지.”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그 친구는 악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친구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서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네가 무슨 우울증이냐. 네까짓게 무슨.
위로는 어려운 것이다. 상대방에게 공감하고, 상대가 고민을 해소하기 위한 적절한 말을 건네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섬세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심리상담가라는 직업이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비전문가인 우리는 위로를 명목으로 폭력을 건넨다. ‘모두가 다 힘들다, 너만 힘든 거 아니다’라는 말로 우리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하려 한다. 하지만 ‘너만 힘든 거 아니다’라는 말은 고민을 가진 당사자에게는 입을 닥치라는 압박으로 받아들여진다.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고통을 저울질한다.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아무것도 아닌 양 넘어가 마땅할 고통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이 특별하지 않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해버린다.
인간의 감정 중 어떤 감정들은 내비쳐서는 안 된다. 부정적인 감정이 주로 그렇다. 우울, 불안, 분노, 슬픔. 이러한 감정들은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 문제로 여겨진다. 친한 친구에게 함부로 털어놓는 것도 내가 친구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두려워 꺼려진다. 부정적인 감정은 정신과 진료실에서 조심스럽게 꺼내거나 혼자 속앓이하며 억누르는 게 최선이다.
힘들다고 토로하면 ‘그렇게 멘탈이 약해서 사회생활 어떻게 할 거냐’하는 핀잔이 돌아온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하지 않는가. 청춘이 힘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건데? 근데 힘들어? 그럼 네가 나약한 것이다. 개인의 슬픔, 고통 따위는 그 사람이 나약하다는 증거다. 아픔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약자로 낙인 찍힌다. 이 힘들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 정도 우울은 당연히 감내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혼자 간직할 수밖에 없다.
속앓이를 하다 참다 못해 부모님에게 털어놓는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하지만 부모님은 콧방귀를 뀐다. 네가 뭘 했다고… 나 때는 말이야… 너 나이 때 고생해봐야……. 아무렴, 당신은 참으로 힘겨운 시절을 견뎌내 저를 키우셨죠. 자식은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자책한다. 모두가 힘들어 하는데, 힘든 게 당연한데, 나만 유난 떠는 건가.
몇 달 뒤 자식을 잃은 부모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부짖을 것이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고, 왜 혼자 끙끙 앓았냐고, 그렇게 힘들면 말하지 그랬어…. 영정 사진 속 젊은 청년의 사진은 주름 하나 없이 앳된 얼굴로 활짝 웃고 있다. 그 누가 저 어여쁜 미소를 보고 나약한 녀석이라며 손가락질 할까.
글쎄? 난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