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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Apr 07. 2024

"실종된 제 딸을 찾지 말아 주세요."

추리 게임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


 과거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리뷰할 때 ‘추리 소설은 카타르시스를 얻기 위해 읽는다.’라고 했다. 복잡한 사건을 탐정이 모두 풀어내고 범인을 밝혀내는 순간 독자는 대리적 쾌감을 얻는다. 추리 소설에 반전이 많이 쓰이는 것도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추리 게임은 어떨까? 소설이나 게임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이 범인을 밝혀내는 건 똑같은데. 하지만 소설과 게임은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사건을 풀어야 하는 탐정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추리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어디까지나 대리 체험에서 오는 감정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은 소설 속 탐정이고, 독자는 사건 외부의 관찰자에 불과하다. 추리 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탐정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잡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추리 소설과는 다른 재미를 느끼게 된다.


캡콤의 <역전재판 시리즈>. 명작 추리 게임 하면 항상 거론된다.


 그렇게 추리 게임은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해갔다. 대표적인 시리즈로 ‘역전재판 시리즈’와 ‘단간론파 시리즈’를 꼽고 싶다. ‘역전재판 시리즈’는 탄탄한 스토리와 4차원스러운 개그, 꽤나 어려운 난이도로 인기를 끌었고, ‘단간론파 시리즈’는 추리 난이도는 낮추되 오타쿠를 겨냥한 캐릭터성과 충격적인 세계관, 그리고 미니게임과 미연시 요소의 접목으로 매니아층을 만들었다.


 그러나 추리 게임이 줄곧 받아온 비판이 있다. 바로 스토리가 일방향이라는 점. 추리 게임 특성상 내러티브가 중요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대부분의 추리 게임은 스토리가 일방향적이었다. 플레이어가 하는 일이라고는 클릭하면서 텍스트를 읽다가 선택지가 나오면 잠시 고민하고 대답하는 것밖에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플레이어의 경험이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역전재판 시리즈’를 비주얼 노벨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이것이다. 게임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소리다.


 추리 게임의 재미를 유지하면서 일방향적인 스토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동안 여러 추리 게임이 일방향적 스토리텔링 방식을 탈피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오늘 소개할 게임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도 그중 하나다.


SOMI,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 2024




말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해


 게임을 시작하면 다짜고짜 스토리가 진행된다. 은퇴한 경찰 ‘전경’에게 젊은 경찰이 찾아와 대뜸 ‘서원이 실종 사건’을 기억하냐고 묻는다. 전경은 흐릿한 기억을 최대한 더듬는다. 서원이 아버지가 서원이를 찾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일, 서원이 어머니가 실종 신고를 한 일, 범인이 자수하여 서원이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고백한 일.


서원이를 찾지 말고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남겨달라는 서원이 아버지


 스토리를 쭉 보다가 젊은 경찰이 기억을 제대로 떠올리라고 말하더니, 대화 속 ‘놀이터’를 클릭하도록 한다. ‘놀이터’를 클릭하니 ‘놀이터’ 키워드가 포함된 대화가 주르륵 뜬다. 플레이어는 그중 하나를 클릭하여 대화를 확인한다.


'#놀이터'를 클릭하면 놀이터 키워드가 포함된 대화가 뜨고, 하나를 선택하여 해금할 수 있다.


 여기까지 튜토리얼을 진행하면 플레이어는 ‘대화 속 키워드를 단서로 새로운 대화를 찾아나가 진상을 파악하는 게임이구나’ 깨닫는다. 2015년작 추리 게임 <Her Story>와 유사한 방식이다. Her Story를 플레이했던 사람이라면 금방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나온 인물 중 올바른 화자를 추리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클릭하며 스토리를 보다가 젊은 경찰이 ‘정말 한 사람과 한 대화가 맞냐?’라고 질문한다. 여기서부터 이 게임의 핵심 시스템이 드러난다. 플레이어는 이 대화를 누구와 한 것인지 화자를 맞혀야 한다. 화자를 맞히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 대화를 언제 한 것인지도 알아내야 한다.


 즉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는 대화의 화자를 바꾸고, 대화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올바른 대화문을 완성하여 ‘서원이 실종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게임이다. 기억이 불안정한 노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도 게임 시스템을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뒷받침한다.




의사소통의 구성 요소


 중학생쯤에 의사소통의 구성 요소를 배운다. 발신자, 수신자, 메시지, 맥락, 매체, 피드백 등이 대화를 구성한다. 보통 게임에서 주인공이 다른 인물과 대화하면 발신자, 수신자, 메시지, 맥락이 모두 명확하다. 스토리적 반전이나 서술 트릭이 있지 않은 이상 발신자와 수신자는 주인공과 다른 인물, 메시지는 대화 내용, 맥락은 지금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다.


 하지만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에서 대화는 주인공 ‘전경’과 전경이 나눈 대화 ‘메시지’만 명확하다. 전경이 대화를 나눈 상대가 누구인지, 그 대화의 맥락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확실하지 않다. 플레이어가 추리해야 한다. 범인, 범행 방법, 증거는 추리할 필요는 없다. 대화를 완성해가면 저절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모든 인물과 대화와 주인공 '전경'의 기억을 의심해야 한다.


 이 게임은 힌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게임이 막혔다면 공략을 보는 게 아닌 이상 스스로 풀어야 한다. 이 게임에서 믿을 건 ‘스토리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능력’밖에 없다. 대체 서원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논리적인 증거 없이 그동안 수집한 대화를 단서로 스스로 생각해내야 한다. 기존의 추리 게임이 플레이어의 추리력과 논리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스토리가 주어졌다면,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는 스토리를 우선 적극적으로 추측해야 깰 수 있다.


 또한 어떤 대화를 먼저 수집하고, 어떤 대화를 먼저 맞히냐에 따라 플레이어가 사건의 진실을 알아가는 길이 달라진다. 게임의 스토리는 하나지만, 플레이어가 스토리를 알아가는 루트는 경우의 수가 다양하다. 이 때문에 플레이어는 어떤 대화를 먼저 해금할지, 어떤 문제를 먼저 풀지 고민한다. 내 경우는 서원이 오빠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놀이터, 문구점, 서원이 아버지 루트를 먼저 했다. 다른 쪽 이야기가 궁금했다면 다르게 플레이했을 것이다.


 그렇다. 이 게임은 ‘스토리텔링 게임’이다. 대화의 화자와 맥락을 추리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기존 추리 게임의 비판점이었던 일방향적인 스토리와 단조로운 플레이 경험을 극복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추리 게임’이기에 사용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 방법을 소설이나 영화 같은 다른 매체에서 쓸 수 있을까? 이 방법을 추리 말고 다른 장르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는 추리 스토리텔링 게임이다. 추리 장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쉽게 깰 수 있다. 그러나 추리 장르에 친하지 않은 사람, 이런 장르를 처음 하는 사람은 꽤나 헤맬 것이다. ‘추리 게임’이어서 시도할 수 있었던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게임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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