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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May 10. 2024

나의 작은 우울

우울증을 받아들이기


 '우울증'이란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생 때였다. TV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린 피해자의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부모의 폭력을 견디다 고등학생 때 가출하여 혼자 살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사회와 고립되어 고독하게 지내는 모습이 비쳤다. 어느 날 그는 자살 기도를 했다. 그는 응급실에 실려갔다. 자살은 실패로 끝났고, 병상에 누운 그의 절망스러운 인터뷰가 이어졌다.


 흰색 가운을 입은 전문가는 우울, 자해, 자살 등 무서운 단어를 나열했다. 나와는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상은 ‘우울증은 저런 끔찍한 경험을 겪은 사람들이 걸리는구나’였다. 우울증은 가족이 죽거나, 학대를 당하거나, 수능을 망친 사람들만 걸리는 병이라고 믿었다. 일종의 ‘우울증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의 나는 내가 우울증에 걸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학창 시절의 나는 내 우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에게 학대를 당한 적도 없고, 소중한 사람이 죽은 적도 없고, 시험을 망친 적도 없다. 부부싸움이야 웬만한 가정에서 다 일어나는 일이고, 학창 시절 수험 스트레스는 누구나 겪는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내 삶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보편적이었다. 나에게 우울의 자격 따윈 없었다. 그래서 내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그저 내가 나약해서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겪는 일인데, 내가 의지가 없고 나약해서 유난 떠는 것이라고 여겼다.


 고통은 점점 깊어져갔다. 누구나 겪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힘들어하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울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왜 이리도 나약하고 의지박약일까, 스스로를 비난하고 험담하는 날이 늘어갔다.


 점점 불행한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누구라도 불행하다고 인정해 줄 만한 사연을 가진 사람. 우울증의 자격을 가진 사람. 차라리 내가 온전히 불행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점차 불행에 우열을 나누고, 불행을 갈구해 갔다. 길을 가다 교통사고가 나서 크게 다치거나, 소중한 누군가 죽길 바랐다. 내 우울증에 합당한 이유가 생겼으면 했다. 그래야만 내 증상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내가 우울증일 리 없다’라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우울증의 자격이 있다, 특별한 사람만 우울증에 걸린다는 생각이 내 우울증을 더 심화시켰다. 이 생각 때문에 고통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았다. 우울증 때문에 힘든 것을 나약함이니 의지박약이니 따지고 있으니 해결될 리 없고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했다.


 ‘내가 힘든 것은 우울증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특별히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병에 걸려서 고통스러운 것뿐이다. 나 자신에게 원인을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내 우울증을 받아들였다. 우울증의 자격 따위 없다. 우울증은 지독한 겨울 감기와도 같아서,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속에 숨어 들어온 이 작은 우울은 아마 평생 동안 나와 함께할 것이다. 나는 이것과 같이 살아보려 한다. 언젠가 또 우울에 힘들어할 날이 오겠지만, 이제는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My Little Blue>, painted by MS Image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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