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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Apr 22. 2024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저주

부전자전의 저주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된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가해자의 인터뷰에서 보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술을 마실 때마다 자신을 때렸는데, 어느새 자기가 가정을 꾸리니 자기도 아버지처럼 가정학대를 하고 있었다는 사연이었다.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했는데, 그렇게나 증오하던 아버지가 하던 짓을 자기도 하게 된다는. 무서운 의문이 들었다. 나도 어른이 되어 아버지가 되면, 아빠 같은 인간이 되는 걸까?






 처음 정신과에 찾아갔을 때, 의사 선생님은 나와 상담을 나누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게 아버지에 향한 증오가 쌓여 있다고. 선생님의 질문에 최대한 솔직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아버지를 향한 증오’가 속에 쌓여 있다니. 그것이 내 우울증의 진단이었다.


 나는 왜 아버지를 증오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빠는 내게 상처를 주었다. 어린 내 눈앞에서 엄마를 죽이려고 식칼을 들이댔고, 고함을 치며 화를 내다가 현관문을 쾅 닫고 몇 번이나 가출했다. 그리고 아무 사과 없이 집에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온몸을 시뻘겋게 붉혀가며 자식과 진심으로 싸우는 모습도 많이 봤다. 자신의 자식을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노려보는 인간을 나는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기적이고, 뻔뻔하고, 무책임한 저런 인간이 내 아버지라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은 내게 저주였다. 아빠 같은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빠처럼 술에 취하고 지랄하지 않기 위해 평생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리치고 화내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제하는 법을 익혔다.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 새벽까지 공부하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먼저 사과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빠가 하는 행동을 따라 하지 않기 위해 내 모든 행동을 검열했다. 아빠를 반면교사 삼아 살아왔다.


 하지만 부전자전의 저주를 떨쳐낼 수 없었다. 친척 어른이나 선생님을 만날 때면, 항상 나보고 아버지와 똑 닮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칭찬의 의미로 건넨 말이었겠지만,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유전’은 무서운 놈이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반씩 물려받았다. 내 유전자의 절반은 내가 증오하는 아빠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빠를 닮을 수밖에 없다. 외모도, 성격도, 행동도 말이다.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간이 흐르면 나도 아빠처럼 추악한 인간으로 변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입히고, 술에 취해 경찰서를 들락거리고, 아내를 식칼로 찌르게 되는 걸까. 나이가 들어 주름이 생기고 머리털이 빠지면, 거울 속에 내가 증오하던 인간이 비참한 얼굴로 서 있을까.






 글을 쓰는 것도 가끔씩 싫어진다. 아빠는 작가다. 에세이나 시를 써서 책을 몇 권 낸 모양이다. 아빠가 하는 행동을 모두 싫어하기로 했으므로, 당연히 글을 쓰는 행위도 혐오했다. 글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인격을 어느 정도 반영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거짓으로 점철되어 작가와 전혀 딴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빠를 보고 배웠다. 작가인 아빠는 똑똑하고 철학적이고 점잖은 사람인 척 굴었고, SNS에서 사람들에게 작가님 호칭을 들으며 지냈다. 내가 집에서 목격해 온 아빠와 작가 아빠는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어떤 거짓말로 자신을 치장해 왔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글쓰기를 증오하던 내가 지금 브런치 작가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 언젠가 컴퓨터 앞에 앉아 한글 문서를 마주 보고 키보드를 두들기던 아빠의 모습이, 글을 쓰는 내 모습과 겹쳐 보여서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질 때가 많다. 글을 쓰는 재능은 분명 아빠에게 물려받은 것이겠지. 이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우울하고 비참해진다.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이 절망스럽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들기는 내가, 아빠를 증오하면서도 아빠가 하는 짓을 똑같이 답습하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증거이자 증명 같아서. 글을 쓰면서 내 손가락을 모두 잘라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가끔씩 글을 쓰지 않는 기간이 찾아오는 것도 내 속에 글쓰기에 대한 혐오와 거부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우울증은 아버지로부터 왔다. 아버지가 내 우울증의 원인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내 우울증은 평생 치료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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