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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May 21. 2020

조선의 피 땀 눈물, 창덕궁

도리's Pick 서울 핫 플레이스 6: 창덕궁

요즘같이 녹음이 우거질 때 나는 궁이 고프다. 궁은 언제 가도 좋지만, 매번 무더운 여름방학에 갔던 기억이 있어서 날이 더워지면 난 자연스럽게 궁에 가고 싶다.  


궁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역사서나 다큐멘터리로 만나던 인물들이 이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온갖 희로애락을 느꼈을 생각을 하면 내가 서있는 공간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아 여기서는 이랬겠구나, ' '저런 일이 있었겠구나, ' '여기선 울었으려나...' 하는 상상을 하면서 궁을 거닐다 보면 시간이 참 잘 간다.  


조선의 5대 궁궐 중 나의 상상력을 가장 많이 자극시키는 궁은 창덕궁이다.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궁인만큼 창덕궁에 얽힌 스토리들이 많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과 창덕궁이 다 불에 탔지만, 규모가 컸던 법궁 경복궁에 비해서 수리 규모가 작아서 창덕궁부터 고쳐서 쓰면서 광해군대부터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왕들이 주로 창덕궁에서 생활을 했다.     


창덕궁은 자연친화적이다. 경복궁에 들어서면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있는 반면, 창덕궁은 물길이 있으면 피하고, 언덕이 있으면 빙 둘러 건물을 지었다. 인위적으로 건물들을 배치하는 대신 자연과 상생하면서 자연이 허락한 자리에 건물을 지었다. 자연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창덕궁 여기저기에 아름답게 오색 물감을 흩뜨려드렸다. 그래서 창덕궁의 사계절은 매번 새롭고 아름답다. 이러한 이유로 창덕궁은 조선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창덕궁 중에서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장소는 왕의 정원 후원과 낙선재다.  


여름에는 우거진 나무가 자연스럽게 그늘을 만들어 후원으로 향하는 길목이 다소 어둡다. 

나무로 드리워진 길 끝에 마침내 후원을 마주할 때 나는 매번 창덕궁과 사랑에 빠진다. 

어두운 녹음 터널 끝에 나타나는 후원의 모습은 신선 세계 같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김홍도의 스승 표암 강세황의 글에도 후원을 마주했을 때의 경이로움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정조가 병풍 작업을 맡기려고 표암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정조는 도착한 강세황을 가만 보더니, “내가 너를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작업을 다 한 다음에 갈래? 아니면 나랑 일단 거기 가서 다 놀고 작업할래?" 했다. 


막중한 임무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궁에 왔는데 왕의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강세황이 “아…”하며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자 정조가 

“오, 뜸 들이는 거 보니까 너도 놀고 싶구나? 그럼 나랑 놀고 그거 나중에 해~”  


이건 뭐 답정너 정조였다. 

이 기록을 보고 정조가 새삼 귀여웠다. 내가 보기엔 정조 본인이 놀고 싶어서 강세황을 꼬드긴 것 같았다.  


그렇게 정조를 근질근질하게 한 정체는 바로 창덕궁의 후원이었다. 정조는 강세황을 데리고 후원을 갔다. 당시 후원은 금원이라고 불렸다. 임금이 허락한 신하들 외에 다른 외부인들의 접근이 금지된 공간이기에 금원이라고 불렀다. 강세황은 ‘마치 신선 세계에 온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에 온 게 믿기지 않는다’ 등등 정조를 따라다니면서 후원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느낀 소회를 호가유금원기에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이처럼 창덕궁 후원은 본래 임금의 허락 없이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었다. 

원래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더 궁금하고 더 들어가고 싶지 않은가? 

과거 이곳이 왕의 허락 없이는 출입이 불가한 공간이라고 하니 후원을 구경할 때는 정말 더 감사한 마음으로 조용하고 경건하게 내가 마치 강세황이 된 것처럼 조심조심 구경을 하게 된다.  


후원은 창덕궁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하는 큰 공간이다. 중간에는 천원지방 사상을 담아 만든 부용지가 있다. 천원지방은 동양 특유의 우주관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사상이다. 부용지가 반듯한 네모 모양의 연못인데 그 안에 인공적으로 둥글게 만든 섬을 조성해서 천원지방을 표현했다. 정조가 부용지를 거닐면서 신하들에게 퀴즈를 많이 내곤 했는데 오답을 말하는 신하를 부용지의 둥근 인공섬에 유배를 보내겠다고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참 따뜻하고 장난기 많은 왕이었던 것 같다)


후원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주합루이다. 

주합루로 이어지는 길 또한 예술이다. 

화단처럼 돌로 된 거대한 계단 옆으로 대나무와 꽃들이 각 층층 예쁘게 조성되어 있다.  


주합루로 이어지는 길 입구에는 어수문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뜻으로 정조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나는 당연히 물고기는 신하들이고 물은 임금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조의 의도는 반대였다. 정조는 자신을 물고기에 신하들을 물에 비유해 물은 물고기가 없어도 되지만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의미로 왕은 신하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예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짜리 건물이 있다.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정조의 도서관 규장각이 있고, 그 위에는 열람실 기능을 했던 주합루가 있다. 바로 이곳에서 정조의 개혁 정치가 이루어졌다.  


숙종 때 세 번의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의 폐해를 없애려고 애를 썼으나, 뿌리 깊게 내린 붕당 정치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 영조도 붕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탕평책을 한다고 했으나 고착화된 악습은 쉽게 없어질 줄 몰랐다. 결국 붕당 정치로 인해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까지 본인의 손으로 뒤주에 갇혀 죽게 했다. 이러한 모진 풍파 속에서 태어난 게 정조다. 편할 리 없었다. 죄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정조가 왕이 되기 전부터 쫓아다녔다. 왕이 되고 난 이후에도 정조는 늘 옆에 칼을 두고 잘 정도로 암살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늘 정조 주변에는 목적이 있어서 접근하는 사람들이거나 정조를 없애려고 하는 정적들 투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는 자신이 정말 믿고 의지할 충신이 필요했다. 붕당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아닌 진정 백성을 위하고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정치를 하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필요했다. 그러한 간절한 바람에서 만들어진 게 규장각이다. 규장각은 세종에게 집현전과 같은 곳이다. 정조는 유능한 인재들을 뽑아 그들이 붕당 정치에 휘말리기 전에 규장각으로 데리고 와 자신이 원하는 개혁의 아이디어를 그들과 나누며 민생 안정을 도모하려고 애썼다.  


2층 주합루에 오르면 천원지방 사상의 부용지가 바로 보인다. 정적들이 도처에 깔려 숨 쉬는 모든 순간이 긴장되고 힘들었을 정조에게 있어서 규장각만큼은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었으리라. 이 공간에서 정조는 부용지를 바라보며 천원지방의 우주관을 상기하며 그의 야망과 철학을 유감없이 펼쳤을 것이다.  




창덕궁 후원이 나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한다면 낙선재는 내 마음을 묵직하게 가라앉게 한다. 


개인적으로 낙선재의 외관이 모든 궁궐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든다. 궁궐 내의 일반 건물들은 단청 장식으로 형형색색 화려한 데에 비해 낙선재는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아 소박한 듯 하지만 창살이나 문살의 디테일이 너무 아름답다. 색은 심플해서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건물 구석구석의 디테일이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러운 느낌을 나게 한다.  


낙선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헌종이 빠질 수 없다. 

가끔 사극을 보다 보면 왕들이 너무 잘생겨서 약간 현실감이 떨어질 때가 종종 있다. 김수현, 박보검, 현빈과 같은 인물이 능력 있는 왕까지 하면 솔직히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세상 너무 혼자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시대 왕 중에 잘 생기기로 유명한 왕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헌종이다. 안타깝게 헌종은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로 요절을 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업적은 없지만, 얼굴이 잘 생겼음엔 분명하다. 궁궐 내의 많은 궁녀들이 헌종을 자석처럼 따라다녔다고 전해진다.  


이런 헌종의 중전이었던 효현왕후가 16살인가 19살인가 하는 나이로 일찍 승하한다. 다음 해, 새 중전을 뽑기 위해 중전 간택을 실시했는데, 원래는 이 간택 절차에 왕 본인은 참여하지 않지만 이례적으로 헌종이 중전 간택 과정에 참여했다. 여기서 헌종은 경빈 김 씨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경빈 김 씨가 아닌 명헌왕후 홍 씨를 중전으로 책봉한다. 어쩔 수 없이 명헌왕후와 결혼은 했지만, 헌종은 경빈 김 씨를 마음에서 지울 수 없었다. 3년이 지난 후 헌종은 명헌왕후 홍 씨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경빈 김 씨를 후궁으로 들인다. 3년 만에 다시 만난 경빈 김 씨가 얼마나 사랑스러우랴. 헌종은 경빈 김 씨를 위해 낙선재를 지어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경빈 김 씨를 후궁으로 들인 지 2년 만에 헌종은 승하한다. 그리고 경빈 김 씨는 궁을 떠나야 했다. 낙선재와 얽힌 비극적인 조선의 여인이 경빈 김 씨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낙선재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말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고,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어린 시절 일본으로 가야 했다. 대한제국의 볼모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영친왕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본으로 가서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일본은 조선 황실의 정통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영친왕을 일본 왕족과 정략결혼을 시킨다. 1920년에 영친왕 이은과 일본인 이방자 여사가 결혼을 한다.  


그리고 1945년 우리는 광복을 한다. 그러나 광복을 하고 나서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독립된 조국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갔던 일본에서도 광복된 조선 황실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고, 광복한 조국도 영친왕 부부의 입국을 금지했다. 그렇게 1963년까지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그 어디에서 속하지 못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부표처럼 정처 없이 둥둥 떠있어야 했다. 1963년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왕실의 후손이 아닌 일반시민의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영친왕은 1970년에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이방자 여사는 운명하시는 1989년까지 낙선재에서 사셨다.  


마지막 황태자비의 삶은 화려하고 편안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 같다.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황태자와 결혼을 하면서 이방자 여사는 마치 거대한 크루즈로부터 내려 구명조끼도 없는 돛단배를 탄 기분이었을 것 같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아닌 일본 왕실의 후손으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훨씬 더 일생이 편안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와 결혼을 하면서 이방자 여사는 돛단배를 덮치는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맞아야 했을 거다. 시국을 잘 못 만나 완전한 일본인도 완전한 조선인도 아닌 삶을 살아내야 했던 그녀의 일생이 그저 가엽기만 했다.  


이방자 여사와 같은 시기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도 낙선재 수강재에서 사셨다. 난 덕혜옹주를 생각하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생각이 난다. 아픈 시기에 위태로운 나라의 황족으로 태어나 모진 수모를 겪어야 했던 대한제국의 비운의 덕혜옹주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삶이 놀랍도록 일치한다. 둘은 나라 잃은 국가의 황족으로서 일본으로부터 이용당하고 또 버려지고 본국으로부터도 외면을 받았다. 아무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을 때가 다 되어 다시 자신이 살던 궁으로 돌아오는 그들의 삶이 데칼코마니 같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엔딩 장면에서 푸이는 한때 자신이 살던 궁궐에 늙은 노인이 되어 직접 입장권을 사서 들어오면서 자신이 어릴 적에 앉았던 왕좌를 쳐다보면서 지난날을 떠올린다. 영화 덕혜옹주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치매에 걸린 노인이 된 덕혜옹주가 자신이 어린 시절 뛰어놀던 창덕궁에 돌아와 이곳저곳을 거닐며 추억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둘의 모습이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 시대나 어느 국가나 “마지막”으로서의 삶은 참 비참하고 아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덕혜옹주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낙선재를 갈 때마다 마음을 아리게 한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창덕궁은 조선의 피와 땀과 눈물을 머금고 있는 그런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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