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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삐삐 May 14. 2024

늘 방해받고 가끔 방해한다

친애하는 나의 고양이자매에게 pre4. 같이 살기로 한 선택의 대가

"고양이는 독립적이라서 키우기 편하다던데 맞나요?"

십 년 동안 제일 많이 들은 고양이 관련 질문.

"고양이는 독립적이고 사람에게 치대지 않는다며? 키우기 편하다던데 그래서 둘이나 키워?"

이 질문을 받으면 일단 피식 웃는다. 반사하고 싶은데 세상에서 키우기 쉬운 살아있는 존재가 있을까라고.

작은 토끼, 고슴도치, 패럿, 도마뱀, 파충류, 수족관은 작고 다양한 물고기들... 

편하고 쉬운 생명과 존재는 없다. 이 질문이 불편하지는 않지만 꼬집고 싶은 것 하나는 있다. 키우는 '사람'만이 고려되는 인간의 시점에서 한 질문이다. 고양이가 사람과 살아서 편하고 좋은지에 관한 관점은 없는 질문이다.

"고양이는 독립적이고 혼자 둬도 되는가? 그래서 키우기 편한가?"

이 질문을 두고 사람의 관점에서 먼저 답해 보겠다. 집사라면 1초도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전혀. 누가 고양이를 독립적이라고 혼자 둬도 된다고 누가 그래? 

그렇다. 고양이는 같이 사는 사람과 다른 고양이들에게서 독립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각 고양이 하나는 독립된 개체이고 존재이다. 사람처럼. 주로 비교 당하는 강아지들의 달려드는 사랑과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서 그렇게 보일 것이다.


강력한 경쟁 상대는 노트북

우리 고양이 아띠와 루카는 3개월 무렵 친구들과 같이 운영하는 공간으로 왔고 3년 동안 있었다. 그 공간에서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다른 방에서 사람들의 예술 모임과 다양한 지역 커뮤니티 활동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어릴 때 내 사무공간에서 주로 생활했다. 왜냐하면  주양육자인 내가 거기 있으니까 장난치다가 잠이 들고 누가 오면 나가보고 또 쏙 들어와서 자고 놀고.

천방지축인 청소년 시절부터 아이들의 가장 큰 경쟁자는 노트북이었다. 아깽이 시절은 화면의 커서가 움직이는 것만 봐도 사냥하고 그러다 키보드 위에서 잠이 들었고, 내가 안돼를 외치며 밀어내면 키보드에 손을 얹고 책상 여분 공간에서 기절하듯 잤다.

그 뒤로도 내가 가장 집중하는 대상인 노트북은 다양하게 아이들의 몸무게와 발끝으로 공격과 무시를 당했다. 성묘가 되어서 아예 소파로 쓰고 긴 오타를 만들며 앉아서 나를 쳐다봤다. 주로 짤로 돌아다니는 영상을 만들었지만 난 웃느라 제대로 찍지 못했다.

아깽이 시절 다양한 노트북 어택. 좌 4~5개월 / 중간 우 5~6개월
 순식간에 노트북보다 더 커버린 아이들. 8~9개월 무렵

진화하는 방해공작과 관찰

친구와 헤어져 혼자 집을 구하고 아이들을 데려왔다. 문화예술공간이다 보니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 고양이들은 영역형 동물이라 낯선 존재가 오고 가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물론 괜찮은 다른 고양이들도 많지만 아띠와 루카 자매는 성격이 예민하다. 특히 턱시도인 루카는 간수치가 안 좋아지는 등 몸에 영향이 올 정도라 결단을 내렸다. 집으로 가자, 너희들과 나의 집으로.

원래 집에서 일을 못하는 성격이라 카페나 다른 공간에서 작업을 했는데 고양이들이 있으니 집에서 하는 습으로 바꿔야 했다. 처음에는 산만했지만 지금은 집에서 일할 때 제일 능률이 좋을 정도로 바뀌었다.(고양이는 절대 안 될 것 같은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방해공작은 나날이 발전을 한다. 이 아이들도 필사적으로 가족인 나를 관찰하고 학습하고 나도 아이들을 살피고 배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존재들은 이럴 수밖에 없다. 학습하는 속도와 집중력은 매번 고양이 자매에게 진다. 

일을 보러 나가려고 문을 닫으면 고양이들은 세상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본다. 어딜 가냐고, 아웅 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이미 내 발소리를 다 알고 문 앞에 나와 맞이한다. 강아지랑 다를 바 없지만 반기는 모양이 다르다, 약간 왔냐 요런 느낌. 그리고 밥을 하려고 싱크대에 오르면 낯선 야채 냄새를 맡고, 조리한 음식 모두의 냄새를 맡지만 먹지는 않는다. 밥을 먹을 때 옆에 앉아서 쉬다가 녀석들이 좋아하는 냄새가 나면 발을 내민다. 시키는 대로 냄새를 맡게 내밀면 만족하고 다시 눕는다.

집에서 일을 하려고 컴퓨터를 켜면 다양한 각도에서 나를 보다가 잔다. 캣타워, 책상 위 선반, 책상 옆 프린터 위, 책상 밑 스크래쳐. 내가 눈을 들면 바로 마주칠 수 있는 위치에 자기들 몸을 두고 기다린다. 네모나고 환한 저것이 꺼지고 언니가 일어서면 간식과 밥을 먹거나 놀고, 잠을 잔다는 것을 오랜 학습과 관찰, 수많은 오해와 실패를 겪고 안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아무리 방해를 해도 내가 일을 할 때 포기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이제는 따닥따닥 치는 손과 소리가 멈춰야 자러 가는 신호여서 밤늦게 일해도 애기때처럼 방해를 하지 않는다. 


방해를 직접 하지 않지만 방해받는다

지들 편하게 쉬라고 퀸 침대를 구입했건만 가서 자면 되는데 꼭 내가 보는 곳에서 몸을 말고 자거나 졸고 있다. 아띠는 주로 발을 쭉 뻗어서 나를 향해 놓고 잔다. 나도 만만치 않게 관찰을 했기에 안다. 저 발이 무엇을 말하는지... 특히 늦은 밤에 뻗은 하얗고 귀여운 발. 자러가자자러가자자러가자, 언니야 자자.

몸의 언어를 똑똑하게 잘 쓰는 아이가 아띠이고 루카는 대략 지맘대로이지만 내 주위를 맴맴 도는 걸로 표현을 한다. 밤에 일할 때 내가 화장실을 갈 때랑 완전히 마무리하고 자러 갈 때를 구분한다. 화장실을 갈 때는 틈이 나나 살피러 따라 들어오고 물 한잔 마실 때도 발밑에서 기다린다. 

일을 마무리할 때 어깨를 펴고 의자를 밀고 컴퓨터 화면을 닫으면 아띠는 발딱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를 U자로 새우고 선다. 잠시 밤자리를 위해 집안을 살피고 불을 끄면 살랑살랑 뱃살과 엉덩이를 흔들며 나보다 먼저 침실로 향한다. 

심지에 낮에 내가 앉아서 뭘 하고 있으면 아띠가 계속 운다. '아띠야 왜?' 일어나면 또 엉덩이와 뱃살을 흔들며 나를 침대로 데려간다. 쫓아오지 않으면 돌아보며 아웅 하고 운다. 무장해제된 나는 그래그래 하고 쫓아가주고 이불 한쪽 귀퉁이를 든다. 안으로 쏙 들어오거나 이불 위 내 몸통 옆에 자리를 잡고 나를 지긋이 보다 잠이 든다. 나와 함께 자는 이 낮잠을 자기 위해 조그만 머리로 온갖 연구를 거쳐 만든 과정일 것이다. 

엄청난 아이들의 노력과 결과적으로 미치게 귀여운 의도와 표현에 나는 늘 방해받는다.

작업하다가 이상해서 고개를 드니 컴퓨터 위 선반에 저러고 쳐다보고 있는 아띠(좌), 캣타워에서 자며 나를 기다리는 루카(우)
왜 저러고 있을까 제발 침대나 편한 곳에 가서 자던가 놀던가

관계는 생존의 본질이고 모든 것

얘들이 왜 이렇게 애쓸까? 그들도 나와 함께 살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인간이 키우키 편하냐 이런 질문이가벼워질 정도로 고양이들은 온 힘을 다해 나를 익히고 사랑한다. 어느날 맞닥뜨린 환경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묘생을 살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 키우기 쉬운 사람 아이가 없는 것처럼 세상에 키우기 편한 동물과 생명은 없다. 그들 입장에서도 인간이란 존재가 어렵지만 배워야 하고 밥 주고 아껴주는 것 이상으로 관계를 맺어야 살 수 있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인간의 사고, 인식, 행동과 달리 더 본능적으로 사랑하고 관계 맺고 움직이는 것.

고양이들이 인간인 내게 키운다는 인간 중심의 행위를 넘어서는 관계와 소통을 선물했다. 우리는 같이 살아가고 종의 다름을 넘어서 서로를 탐구하고 살피고 사랑한다. 양육의 과정이 있지만 고양이들과의 삶을 선택한 지구 최상위급 동물인 나의 책임이다. 고양이와 사는 삶의 2할 정도의 과정이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 치우고 밥 주고 물 주고 털 치우고, 털 빗기고 일주일에 3~4회 이빨 닦이고 가끔 몸을 닦아주고. 일 년에 한두 번 병원에 가고.

나머지이자 전부인 8할은 모두 아이들과 나의 관계이다. 서로 눈 마주치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도 존재를 확인하고 작은 기척에 상태를 확인하고. 원하는 것을 주고받고. 내 인생에서 존재에게 가장 많이 수용을 받은 시기를 떠올리면 지금이다. 하지 마란 고양이의 표현까지 다 포함해서 온전히 나를 받아주는 존재와 있다. 영역형 동물이 자기 영역에 맨날 있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사랑해야 같이 살 수 있는 동물이 고양이이다. 이런 존재가 어떻게 키우기 편하고 독립적인가.  같이 있는 존재에 엄청나게 민감한 동물은 다른 존재에 무관심하거나 독립적일 수 없다.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게 될 무렵, 인간과 다른 생존이 달린 고양이의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 난 되게 큰 일을 저질렀구나, 그 선택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겠구나. 그렇다 난 십 년째 생명을 가까운 둔 선택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실실 웃으면서.


나도 방해한다, 요녀석들

요즘은 가끔 내가 아이들을 방해한다. 잘 자고 있을 때 끌어안고 깨우거나 말을 시킨다. 눈을 뜨지도 않고 대답하는 얼굴이 넘 귀여서 종종 난 아이들의 자는 시간을 방해한다. 이 글을 쓰면서 내 아래와 옆에 있는 고양이들의 잠을 한두 번 방해한다. 

아띠야, 아띠야 자니?

루카야, 루카야 자?


                            (2024. 5. 14 새벽에 깨워줘서 고마워, 나의 고양이 자매들. 피곤하지만 말이야)


#고양이 #고양이자매 #아띠와루카 #고양이와사는일상 #묘생 #방해고양이


다양한 곳에서 기다려줘서 참 고맙지만 매우 방해된다 루카야.


너의 꿀잠을 방해하고 싶다 아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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