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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Jun 10. 2020

Every Life

앞서 쓴 편견이 무서운 건 특정 집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몇 가지 사실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 또한 그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편견을 상식으로 둔갑시킵니다. 결혼만 놓고 볼까요? 좋은 직업을 가져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안정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리라는 믿음, 특정 나이가 넘어선 자가 미혼이면 성격에 문제가 있을 것이란 예단, 자녀가 없는 부부 관계는 위태로워지기 쉬우리라는 짐작 따위는 인생 정상 궤도에 대한 편견일지도 모릅니다.


여기 세 쌍의 남녀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 읽은 사람들,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충분한’ 사실들을 가려내고 직업, 자녀 구성 따위 몇 가지 상황을 바꾸었습니다. 이 세 쌍 가운데 부부 관계가 아닌 쌍은 어느 쪽일까요? 어느 쪽이 가장 행복할까요? 또 어느 두 사람이 가장 위태로워 보이세요?




첫 번째 남녀

남자는 변호사, 여자는 전업주부입니다. 아이는 둘 있죠. 큰 아이와 작은 아이 모두 사립 초등학교에 다닙니다. 아이들 통학 거리 단축을 위해 대치동 아파트를 전세 주고 부암동 산자락 아래 주택으로 이사했습니다. 


두 번째 남녀

여자와 남자 모두 직장생활을 합니다. 실력을 인정받은 여자는 미국 캘리포니아 본사 발령을 받습니다. 남자는 서울에 남기로 결정합니다. 둘은 매년 한 달 정도 서울과 L.A. 에서 함께 하는 생활을 이어갑니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습니다.


세 번째 남녀

남자와 여자는 사는 동네에서 카페를 운영합니다. 은퇴한 남자가 커피를 만들고 여자는 디저트를 냅니다. 최근에 초록색 대형 간판을 내건 프랜차이즈가 200미터 아래 관광 정보 센터 바로 옆에 생긴 탓에 그나마 여간했던 수입이 반도 안되게 줄긴 했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카페를 연 이후 처음으로 대학생 외동딸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제시된 사실만으로도 각자의 상식(또는 편견)에 근거해 위의 물음들에 나름의 대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짤막한 사실들 사이에 수많은 행간의 추측들이 사실로 둔갑하겠죠. 예를 들면 두 번째 남녀에게서 ‘아이도 없겠다, 뭐 수틀리면 헤어지겠네. 게다가 몸이 멀면 마음도 따라 멀어진대잖아’, 세 번째에게서는요? ‘힘들겠네, 나이 든 사람들이 하는 동네 카페가 잘 될 리 있겠어? 딸은 어떻게 결혼시킨대? 그래도 별 수 있겠어, 헤어지지 못해 사는 거지, 뭐’ 한데 여기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있다면요? 그래도 대답은 같을까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남자와 여자는 재판 과정에서 판사와 검사로 만나 결혼했습니다. 첫 재판에 진 초임 공판 검사를 배석 판사였던 남자가 불러 드립 커피를 내려준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어요. 결혼한 뒤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내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로펌에서 영입 제안을 받습니다. 아내는 변호사로서 처음 맡은 미국 커피 회사의 독과점법 위반 사건 소송에서 이겨 의뢰인인 커피 회사에게 어마어마한 과징금을 아껴줍니다. 결국 실력을 인정받아 아예 본사로 발령을 받기에 이르죠. 아내가 캘리포니아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거취를 고민하지만 결국 서울에 남기로 해요. 부부는 1년에 한 번씩 긴 휴가를 내어 서로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여행도 다니고 볕 좋은 노천카페에서 따로 또 같이 공부도 합니다. 그렇게 장거리 결혼 생활 3년이 넘어갑니다. 여행도 다닐 만큼 다닌 데다 휴가 기간을 맞추기 점점 어려워지죠. L.A.로 날아온 남편은 아내 얼굴조차 보기 힘듭니다. 아내가 출근하고 없는 동안 이국 땅에 혼자 남은 남편은 바리스타 수업을 들어요. 어느 저녁, 남편이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웬일인지 아내가 먼저 퇴근해 있습니다. 아내는 대뜸 “나 그만뒀어” 합니다. 그러더니 미리 꺼내 둔 티라미수 케이크에 다섯 개 초를 꽂았습니다. “주말에 혼자 할 일도 없고 해서 그동안 베이킹 배웠어. 오늘이 결혼 5주년이잖아. 하루 남긴 했는데 우린 서울에서 결혼했으니까, 벌써 서울은 그 날이네. 근데 커피가 빠졌다. 우리 남편 그동안 배운 실력 좀 보자” 부러 묻지 않은 것인지 물을 말이 없었는지 남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드립 커피를 내립니다.


아내는 남편이 있는 서울로 돌아와 당분간 쉬기로 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요. 딸 하나, 아들 하나. 변호사로서 누구보다 바빴던 아내의 시간은 아이들이 채우죠. 큰 아이가 3학년이 되자 아이들 학교에서 멀지 않은 부암동으로 이사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벌어놓은 돈이 아무리 많았다 해도 판사 월급으론 넓은 집에 아이들 교육비까지 감당할 수 없었던지라 남편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합니다. 남편은 자리 잡고 돈 버느라, 아내는 부암동과 대치동을 왕복하느라 부부가 얼굴을 마주하는 때는 일주일에 한두 번이 고작이에요. 그나마 그 한두 번도 아이들 이야기 잠깐 하다 보면 다음 날을 준비하기에 바쁘죠. 둘째가 누나와 같은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름날 저녁에 일이 생깁니다. 아내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태우고 대치동 학원가로 차를 몰아요. 며칠째 내린 비로 부암동 고갯길은 미끄러웠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아이를 태운 승용차는 북악산 아래로 추락합니다. 순간 쏟아진 장대비에 마주 오던 택배 트럭을 보지 못했거든요. 부부는 그렇게 두 아이를 잃습니다. 석 달 만에 의식을 찾은 아내 앞에 놓여 있던 건 이혼 서류였습니다.


환기 미술관 맞은편 카페 앞, 앳된 여자가 캘리그래피 메뉴 보드 앞에 쪼그려 앉아 소리칩니다. “아빠, 오늘 원두는 그래서 뭐라고?” 앳된 여자는 ‘티라미수’ 아래 아빠가 불러준 어느 남미 도시 이름을 재빠르게 쓰더니 여행가방을 카페 문 안으로 던져놓고 냅다 달리기 시작합니다. “야, 너 다 저녁에 또 어디 가?”, 걸음걸이가 시원찮은 여자에게 앳된 여자는 또 한 번 소리칩니다. “신입생 환영회 있다고 했잖아, 내가!” 어느새 여자 뒤에 선 남자는 말합니다. “에이고, 우리도 오늘은 그냥 접고 들어가자” 22년 뒤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북악산 산자락에, 게다가 같은 지붕 아래 있나 봅니다.


매일 하는 글쓰기와 읽기가 고마운 날이 있습니다. 쓰고 읽다 보면 흘려 들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넓고 깊게 울립니다. 그런 울림이 삶에 당장 무슨 도움이 되냐고요? 그냥 화 날 일이 별로 없고요, 웃을 일이 좀 더 자주 생기고요, 그저 제게 친절한 사람들이 조금 많아져요. 아 참, 아이들이 제게 귀찮을 정도로 많은 말을 하고요, 아내가 자꾸 글 쓰는 방에 와서 훼방을 놓아요. 뭐 그뿐이에요.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gstevens0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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