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스타킹과 타이츠

의식주 : 의도치 않게 식식대는 주부의 근무 일지

by 박쥐마담

봄은, 꽃이다. 기후 변화로 순서를 무시하고 피어나기는 꽃들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매화가 먼저 봄을 알린다. 산수유가 별처럼 빛나기 시작할 무렵 영춘화도 함께 피어난다. 때맞춰 꽃가게에서는 프리지아를 문 앞에 내놓고 손님들을 유혹한다. 노란 꽃들이 ‘설렘 주의보’를 발효하면 햇살 넉넉한 곳에 심긴 목련이 그 뒤를 잇는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싶을 때 벚꽃이 요란하게 봉오리를 터트린다. 철쭉이 피면 늦봄이다. 덩굴에서 개화를 준비하는 장미 꽃송이들은 여름을 재촉한다.


봄은, 가볍다. 두툼한 모직 코트와 김밥 모양 롱패딩을 벗고, 트렌치코트나 점퍼 하나만 입을 수 있게 되니 가뿐하다. 그래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몸을 떠오르게 할 것만 같은 봄 햇살에 속았다가는 꽃샘추위에 대책이 없다. 벚꽃이 피기 전까지는, 세탁소에 코트를 맡겨서는 안 된다. 꽃나무 가지가 찬바람에 마구 흔들리니 다시 코트를 꺼내 입어야 하는데 영 내키지를 않는다. 마음은 이미 봄으로 충만한데 묵은 겨울옷을 다시 입으려니 싫은 것이다.


봄은, 꽃무늬 스타킹이다. 하룻밤 사이 다시 겨울로 바뀐 날씨가 야속하지만, 아직은 겨울의 묵은 때가 켜켜이 앉은 코트를 입고 나가야 하는 날, 나는 살구색 꽃무늬 스타킹을 신는다. 종아리에 피어난 연한 꽃잎들을 보며 일종의 대리만족을 한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잘 신지 않는 꽃무늬 스타킹을, 아무렇지 않은 척 걸치고 나서는 나를 보며, 인생 다 산 경지에 오른 초등학교 ‘6학년’ 딸이 한마디 한다. “엄마는 튀는 걸 좋아하나봐?”


맞다. 엄마는 튀는 걸 좋아한다. 튀는 걸 좋아하는데 자금 사정이 넉넉치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옷 사고 가방 사는데 쓸 돈이 없다. 너도 한번 내 처지로 살아봐라. 자식 셋 입히고 먹이다보면 만 원짜리 한 장 쓸 때도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엄마는 스타킹을 산다. 특히 검은 망사 타이츠는 엄마의 최애 소장품이다. 7년 전 중국 H&M 에서 산 이후, 지금까지 빨고 꿰매가며 잘 신고 있다. 이 타이츠를 신으면 엄마의 ‘가오’는 최고점으로 치솟는다. 아마 수퍼히어로들이 몸에 딱 붙는 바디수트를 입는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가성비가 훌륭한 아이템이다.


2019년 통계청 기준으로 지구에는 77억 1,457만 6,923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중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존재 자체로, 나는 남과 다를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튀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 속에서 산다. 숭고한 ‘우리’는 민족과 국가, 교회의 이름으로 튀는 이들에게 눈치를 준다. 건강한 개인주의자들이 개성을 꽃피우는 봄이 되기를, 다채로워 더 아름다운 봄꽃의 향연을 기다리며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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