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 - 의도치 않게 식식대는 주부의 근무 일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비정규직’이나 ‘비정규 노동’은 전혀 쓰이지 않는 말이었다.” 는 문장을 만났다. 책에서 눈을 떼고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정말 그랬나?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집 <보다>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대학원 시절, 프랑스에서 막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연구위원의 조교로 일할 때 ‘비정규 노동’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석사 논문의 주제로 ‘언론 기업의 비정규 노동에 관한 연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대신 ‘파트타이머’나 ‘임시직’ 같은 말들이 있었다. 연간 성장률이 10퍼센트를 넘나드는 고도 성장 국가에서 파트타이머나 임시직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잠깐 선택하는 직무 형태일 뿐이었다. 인력이 만성적으로 부족했던 때라 대부분 정규직으로 취업했고 정년을 보장받았다(김영하, <보다>, 문학동네, 2014. p.40).”
그땐 그랬다. 김영하 작가가 경영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시절, 나는 고3이었다. 고3 수험생답게 살았으므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몰랐지만, 대학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면 퇴직할 때까지 쭉 다닐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2010년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고3 수험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3들은 내가 비정규직 시간 강사임을 안다. 나는 학생들에게 경향신문에 연재되는 이기호 작가의 미니 픽션을 종종 읽어주곤 하는데, 소설의 주인공 정용과 진만은 알바생이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했으나 정규직이 되지 못했고, 편의점, 음식 배달, 상하차 알바 등을 하며 살아간다. 학생들은 비정규직의 목소리로 비정규직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의 학생들이 나같은 ‘비정규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건 미세먼지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바람과 다를 바 없으니 소설보다 현실성이 더 떨어진다고 자평하다가, 그래도 ‘비정규직’은 ‘평생 무급 노동직’인 ‘주부’보다는 낫지 않은가, 콧방귀를 뀌게 된다.
아내의 애정, 엄마의 사랑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냐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능하다. 단, 좀 극단적인 상황이 되어야만 계산기를 두들길 수 있다. 바로 이혼 소송이다. 이혼 소송 전문 법무법인들은 10년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가사와 육아에 성실하게 전념했을 경우 이혼 소송에서 기여도를 50%까지 인정받을 수 있다고 광고한다(광고는 어디까지나 광고다 - 비율이 너무 높지 않은가). 사업장 폐업이라는 극한 상황에 놓여야 주부의 노동 가치에 값을 매길 수 있다니, 덜 익은 망고를 씹듯 텁텁하고 밍밍하다. 어쩌다 주부가 되어, 요즘은 알바생도 꼭 쓰는 근로 계약서 한 장 없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다가 문득 달력을 보니 화사한 봄 햇살이 내리쪼이는 오늘은, 노동절이다. 주부 친구들끼리 생일에 주고받는 덕담, “생일 하루는 제발 밥하지 말고 외식하자.”를 변용해야겠다. 방풍나물은 새콤하게 초무침하고, 된장찌개에 뿌리 씻다 허리가 폴더폰 되는 냉이 넣어 끓이고, 정작 굽는 사람은 냄새에 질려 맛나게 못 먹는 고등어 한 마리 곁들인다. 수저 옆에 작은 영수증 하나 첨부하며 나직이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노동절 하루는 제발 공짜로 밥먹지 말고 돈 내자.”
만국의 주부들이여, 단결하라!
사진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 - 남이 해 주신 밥 - 입니다. 밥짓기 노동으로 애쓰시는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