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안분지족

의식주 - 의도치 않게 식식대는 주부의 근무 일지

by 박쥐마담

입을 옷 있고 먹을 밥 있고 비 안 새는 지붕 아래에서 잘 수 있으면 족하다. 학생들에게 고전 문학을 가르치다 보면 시가든 산문이든 ‘안분지족’을 꼭 설명하게 된다. 분수를 지키며 만족한다는, 선비의 절제를 나타내는 대표적 관용어구다. 대부분의 남자 양반님네들이 추구하는 ‘안분지족’은 타인, 특히 여성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삶의 태도다. 입을 옷 있고 먹을 밥 있고 비 안 새는 지붕 아래에서 잘 수 있으면 족하다지만, 그네들이 입는 옷은 여성이 손수 짜서 지은 것이고, ‘단표누항’의 대나무 그릇에 담긴 밥도 역시 여성이 지어 올린 밥일 테니까 말이다. 여성에게 빚진, 고매한 삶의 정신이기에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지난주, 신문 칼럼을 읽다가 글에 인용된 책 제목에 동공이 순간 확장되었다. “팬티 바르게 개는 법 - 어른을 꿈꾸는 15세의 자립 수업”. 나 또한 15세 청소년을 키우는 입장인지라, 영재고, 특목고, 자사고 진학 전략을 고민하기보다는 밥 짓기, 청소하기, 빨래하기를 어떻게 전수할 것인지 궁리하는 어미인지라, 칼럼을 읽자마자 퇴근길 서점에 들러 망설임 없이 책을 샀다. 저자 미나미노 다다하루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13년간 근무하다가, 학생들의 무기력, 산만한 수업태도, 의욕 저하의 원인이 자신의 생활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들의 생활력과 자립심을 키워주는 교사가 되고 싶어서 그는 기술가정과 교사로 전향한다. 저자는 청소년들의 생활, 경제, 정신, 성적 자립을 차분히 설명하면서 ‘혼자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권한다. 자기 일을 자기가 처리할 수 있으므로 상대방에게 배신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배려할 줄 안다는 대목에 형광펜을 쳐서 아들에게 주고 싶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삼십여 분 동안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다. 남들에게 책 제목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쓴 것 외에는,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자투리 시간에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는 학생들이 오월의 신록을 보지 못할까 싶어 이양하의 <나무>를 읽혔다. 아이들은 여러 문장들에 ‘심쿵’했다. ‘달’, ‘바람’, ‘새’로 형상화된, 각기 개성이 다른 친구들을 존중하는 나무의 태도에 관한 문장도 좋아했고,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는 문장에서는 남에게 좌우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나무의 모습도 멋지다고 했다. 1964년에 발표된 글이지만 2019년을 살아가는 십 대 청소년들의 마음에도 와닿으니, 명문장임이 틀림없다. “나무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이라서 멋지다는 학생들에게, 안분지족의 지름길은 팬티 바르게 개는 법에 있음을 알려주어야겠다.

이전 18화18. 노동절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