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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Dec 09. 2023

11. 누가 내 가슴에다 불을 질렀나

조직 검사를 통해 내 몸에서 암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부터 대학 병원에서 담당 교수를 만나기까지 나흘이 걸렸다. 처음에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환호성을 올렸다. 하지만 나흘은 내가 암 환자가 되었음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대학 병원에서 달랑 3분짜리 진료를 받고 얼떨떨하게 집으로 돌아온 뒤에야 무지를 자책했다. 유방암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의사에게 아무 질문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무식한 겁쟁이였다.


친구 O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책을 선물해 주겠다고 말했다. 예전에 부하 직원이 유방암에 걸렸을 때 공부하느라 읽은 책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부하 직원의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은 걸린 적도 없는) 유방암을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O는 내과 의사가 유방암에 걸리고 쓴 책이라며 추천을 했는데 제목이 <한쪽 가슴으로 사랑하기>였다. 앗, 제목이 마음에 안 들었다. 두 쪽 가슴 모두 절제한 사람은 어쩌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나는 O에게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O는 그 책이 절판되었고 다른 제목으로 나오는 것 같다며 <굿바이 유방암>을 카톡 선물로 보내주었다. 나는 또 구시렁거렸다. 제목에 유방암이라는 단어가 박힌 책을 집이나 학교에서 펼쳐 볼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더니 전자책을 보내주었다. O는 나의 투정을 다 들어주었다.


그 책을 받은 즉시 읽고 유방암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났어야 했다. 책을 받고 다시 대학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기까지 3주의 시간이 있었다. 그 3주 사이에 책을 읽었다면 수술 방식에 대한 고민도, 방사선 치료에 대한 걱정도 덜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스마트폰에 전자책을 다운로드하였으니 언제 어디서든 읽을 수 있었는데도 미루고 또 미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퀴블러-로스의 5단계 이론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 변화를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로 설명하는데, 최종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중증질환을 진단받은 환자도 이와 유사한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변화가 반드시 단계적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부정과 분노가 동시에 빗발치기도 하고 우울을 거쳤다고 부정과 분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암 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척하면서 부정하고 있었다. 유방암에 당첨된 것은 속상한 일이었지만 그 당첨 때문에 휘청거리는 나 자신을 보는 게 몇 배는 더 속상할 것 같았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만약 유방암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된다면  평정심에 금이 갈 것이 확실했다. 이런 종류의 정신승리는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뿐이다.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신 포도는 안 먹는다. 안 먹어.’


나를 수술할 의사가 모든 0기 암 환자는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방어막이 와장창 깨졌다.  의사의 말은 내게 꼭 필요한 말이었고 나는 그 말 덕분에 현실 부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의사는 한 마디를 더 했다. 0기 암 환자가 수술을 받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 임상 연구를 하고 있지만, 환자분은 그런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의사는 그 말을 하면서 살짝 웃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입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짧은 웃음이 얼굴에 스쳤다.


그는 왜 웃은 것일까? 의료인이 아닌 내가 최신 임상 연구를 꿰뚫어 본 것이 당황스러워서 웃었다고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0기 암이지만 수술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나를, 내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마음에 반농담조로 말하다가 웃었다고 해석해야 하나?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은 상황인데 의사는 웃었다는 사실 때문에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들었다. 차라리 그가 무표정하게 말했다면, 아무런 감정 없이 객관적인 정보만 전달했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는데… 의사의 웃음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내 모습이 가장 마뜩잖았다.


“교수님, 제가 웃긴가요? 아니면 제 질문이 웃긴가요? 평소에 사람을 웃기는 낙으로 삽니다만, 어느 포인트에서 웃긴 건지 모르겠네요. 좀 알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나를 수술할 의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환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에게는 전문적인 의학 지식과 그 지식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 정도가 아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기에 나는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그는 신이 아니지만, 나는 그에게 내 생명을 좌우할 권한을 일임했으므로 그는 신의 역할을 대행한다. 신과 같은 의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은 환자가 있을까.


밴드 잔나비가 2014년에 발표한 노래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는 한국에서 제목이 두 번째로 긴 노래다.  마흔두 자나 되는 제목의 가사가 서정적인 멜로디를 타고 이어진 뒤에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누가 내 가슴에다 불을 질렀나”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때 팬들은 보컬의 ‘질렀나’의 ‘나’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잔나비!”라고 떼창을 한다. 그러면 원래 가사의 의미와 다르게 내 가슴에 불을 지른 사람은 잔나비가 된다. 나는 진료실을 나오며 공식 떼창 문구인 “잔나비!”를 “교수님!”으로 바꿔 외치고 싶었다. 의미가 모호한 의사의 웃음은 확실히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여우 코스프레를 때려치우자 아주 오랜만에 학구열이 제대로 불타올랐다. 선물로 받은 <굿바이 유방암>을 완독 하고, 각종 유방암 관련 동영상을 몇 시간씩 들여다보았다.


유방암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재미를 느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한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재미, 몰랐던 분야를 조금씩 알아 가는 재미가 있었다. 김영민 교수가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던 "무지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는 재미"를 암 때문에 경험할 줄이야. 무지했던 과거의 나는 무지막지하게 깜깜했다. 비록 돌연변이지만 암도 엄연히 내 세포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아무리 순수 문과의 결정체라고 해도 너무 심했다.  가까운 친구와 친척 중에 암 환자가 있는데도 암에 이토록 무지할 수가 있나? 국민 세 명 중 한 명이 암으로 사망하고 건강 검진을 통해 암을 조기에 발견하려고 애쓰지만 정작 암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없다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부뿐이다. 알면 더 무섭지 않고 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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