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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Feb 16. 2024

21. 새로운 종양

사람은 내일 일을 모른다. 내일에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 있는데,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면 기대보다는 걱정으로 기울어지기가 쉽다. 불면증을 앓으면 간밤에 잘 못 자서 괴롭기도 하지만 내일도 잘 못자리라는 염려에 눌린다. 불면증은 내가 얼마나 소심하고 약한 사람인지 시시각각 자각하게 한다. 


닷새만에 제대로 된 잠을 잤지만 몸은 여전히 무겁고 피곤했다. 15일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으니 달랑 하룻밤으로 쌓인 피로가 풀릴 수는 없겠지. 아이들이 현관을 나서는데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불면의 원인이 타목시펜이라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먹으면 잠을 못 잔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이 약을 5년간 먹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침을 먹고 약을 삼켰다. 설마 바로 내일부터 다시 못 자는 건 아니겠지 하는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방사선 치료는 반환점을 돌았다. 커피 생각이 간절했지만 꾹 참았다. 


그날 밤, 마왕은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두어 시간을 자고 깼다. 대학 병원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만나려면 최소한 2주가 걸리는데, 앞으로 2주를 더 못 잔다고 생각하니 참담했다. 동네 가정의학과에 가서 상담을 했다. “선생님, 저는 하루하루가 너무 힘든데, 대학 병원 진료 예약을 당길 수가 없어요. 남은 2주 동안 멜라토닌을 처방해 주실 수 있을까요?” 멜라토닌은 뇌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으로, 수면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는 마트에서도 파는 보충제이지만 한국에서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는 전문의약품이다. 의사는 멜라토닌을 2주 정도 복용해서는 효과를 보지 못할 거라며, 차라리 수면제를 처방받고 2주 뒤에 전문의와 장기적인 투약 계획을 논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2주 동안 졸피뎀을 복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의사는 괜찮다고 했다. 이 동네에서 실력 있고 양심적이라고 알려진 의사의 말인데도 흔쾌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졸피뎀을 2주 동안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음 날 대학 병원에서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를 만났다. 의사는 방사선을 조사하는 부위를 살폈다. 그는 피부가 조금 붉게 변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진료를 마치려고 했다. 의사는 나의 불면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는 방사선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이고  그 영역 외에는 그의 소관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그가 묻지 않았어도 피드백을 했다. “교수님 말씀대로 타목시펜을 끊었더니 불면 현상이 없어지더라고요. 불면의 원인은 확실해졌어요.” 나의 불면은 나에게만 중요한 문제였다. 진료실을 나와서 간호사에게 정신건강의학과 펠로우 선생님께 진료를 받겠다고 말했다. 2주 이상 불면의 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예약 알림톡이 들어왔다. “암통합케어센터 정신종양(임상강사)”이라는 글자 조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정신… 종양? 내 정신에 종양이 있다는 건가? 낯선 단어에 적응이 안 되어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국정신종양학회에 따르면 정신종양학이란 암이 환자의 신체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암의 심리적, 사회적, 행동적 측면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라고 한다. 암에 대한 치료법이 발달하고 생존율이 증가하면서 암 환자의 정신 건강을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름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예약 문자는 반가웠다. 


방사선 치료는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치료를 시작할 때는 아이들이 방학이었고 내가 먹을 ‘건강식’에 아이들의 끼니까지 준비하느라 주방에서 종종거리다가 하루가 저물었다. 3월이 되면서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낮 시간에 혼자 집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졸지에 출강할 일정도 없어졌으므로 남는 시간을 모으면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허황된 기대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깨어 있는 시간도 누워 있는 시간도 모두 멍했다. 종일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채소와 잡곡밥과 두부를 억지로 욱여넣고 노트북을 켜면 쓸 말이 없었다. 병원에서 꼭 운동을 하라고 했는데, 주방에서 두어 시간 서성이면 기운이 다 빠져서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방사선 치료를 한 회차 남겨 놓고 마지막으로 담당 교수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치료가 종료된 뒤에도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계속 보습을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보습 크림을 처방해 주었고 그 크림을 다 사용한 뒤에도 로션이나 크림을 바르라고 했다. 불그스름하게 변한 피부는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원래 상태로 돌아올 것이고, 가능성은 적지만  방사선폐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6개월 뒤에 폐 상태를 보기 위한 진료가 한 번 더 있다고 했다. 피부에 큰 변화가 없이 방사선 치료가 끝나 가고 있었다.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저녁에 마지막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막방’이 끝나고 방사선사가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건강하시라고 인사말을 건네주었다. 의례적인 말인 줄 알지만 무척 고마웠다. 방사선 치료를 시작할 때 받았던 20g 용량의 스트라타 XRT 크림은 방사선 치료 종료와 함께 딱 떨어졌다. 치료가 끝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홀가분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한 달째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버텨 내기가 쉽지 않았다. 가정의학과에서 처방받은 졸피뎀을 매일 먹지는 않았다. 정말 먹어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은 날에만 먹으면서 진료가 예약된 금요일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진료를 기다리는 닷새 동안 방사선 치료 초기에는 느끼지 못했던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방사선 피로구나. 그 피로감에 불면으로 인한 피로까지 추가되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는 자괴감이 들어서 더 괴로웠다. 움직일 기운은 없지만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더 잠들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게 뻔했다. 이를 악물고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평소에 하던 일을 절반도 할 수 없었다. 그 절반의 에너지를 식사를 준비하는데 쏟아부으면 하루가 저물었다. 


대망의 ‘정신종양’ 전문의를 만나는 날, 아침에 샤워를 하고 새로 처방받은 보습 크림을 바르는데 유륜에 붙어 있던 딱지가 떨어졌다. 유륜의 피부 세포들이 한 꺼풀 벗겨지는 중이었다. 딱지 아래에 감춰진 새살은 아기 발바닥 같은 연분홍색이었다. 몸의 생명력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종양은 과연 어떻게 치료할지 궁금해졌다.  


암통합케어센터는 대학 병원의 암 병원 지하 1층에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왼쪽에 ‘암통합케어센터’라는 글씨가 보였다. 경사면에 세워진 건물이라 말만 지하일 뿐, 유리  통창 가득히 봄 햇살이 들어왔다. 그 통창으로 창경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정면으로 보였다. 마침 흥화문 안쪽 옥천교 주위에는 매화와 살구꽃이 만발해 있었다. 흥화문의 당당한 지붕과 연분홍 꽃송이를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당인데? 지친 몸을 끌고 병원을 방문하는 환우들에게 숨겨진 명당을 널리 알려주고 싶었다.     


도착 접수를 하고 간호사를 만났다. 간호사는 진료를 받기 전에 정신 건강에 관한 설문지를 작성할 거라고 알려 주었다. 안내를 받아 진료실 옆방에 들어갔다. 수련의로 짐작되는 의사가 현재 내가 겪고 있는 불면에 대해 물었고 입면 장애와 중도 각성, 조조 각성 등이 모두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설명을 마치고 세 종류의 설문지를 받았다. 최근 2주간의 상태를 묻는 질문들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냐는 질문도 있었는데 아니라고 표시했다. 불면으로 말할 수 없이 괴롭지만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부지런히 설문지를 작성하고 대기실로 나가서 내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휠체어에 탄 남자 어르신과 딸로 보이는 보호자가 진료실로 들어갔다. 5분쯤 지난 뒤에 어르신만 나오고 딸은 15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대학 병원은 모두 ‘3분 진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는 사실, 환자보다 보호자 상담이 더 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혼자 남겨진 어르신은 무료하신지 간호사에게 말을 걸다가 어떤 여자 환자가 같이 온 남편에게 “나 혼자 들어가?”하고 물으면서 예진실로 들어가니 그 말을 받아서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모를 말씀을 중얼거렸다. 나는 혼자 다니는 게 좋은데 작년 10월에 넘어져서 이렇게 딸이 데리고 왔다고. ‘어르신, 저도 혼자 다니는 게 좋아요. 끝까지 혼자 다니고 싶어요.’ 마음속으로 대답을 했다. 진료가 한 시간 이상 지연되니 기다리다 짜증이 난 남자 환자가 간호사에게 불평을 했다. 아직 내 차례는 멀었다. 불평하던 남자는 4분 만에, 다른 남자는 10분 만에 진료를 마쳤다. 나는 얼마나 상담을 하게 될까?


진료실에 들어갔다. 임상 강사는 젊다 못해 앳되어 보일 정도로 동안이었다. 이 젊은 의사가 나를 마왕에게서 구해줄까? 의사는 타목시펜 복용으로 불면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고, 타목시펜이 대사가 되는 과정과 충돌하지 않는 약을 골라서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2016년에 불면증을 겪었던 적이 있고, 당시에  항불안제인 자낙스를 처방받아 복용했다고 말했다. 의사는 자낙스도 먹을 수 있는 약 중 하나이니 멜라토닌과 함께 먹어보자며 2주분을 처방해 주었다. 진료실을 나와 시계를 보았다. 대학 병원에서 의사와 눈을 맞추고 수용적인 분위기에서 15분이나 대화를 하다니 감격스러웠다. 불면에 시달리면서 잃어버렸던 자신감이 봄기운에 새순이 돋듯이 솟아올랐다. 듣도 보도 못한 정신종양아, 널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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