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산뜻하게 가벼운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저녁 먹을 때가 되기 전 돌아가는 기차를 예매한 엄마. 가끔 혼자 사는 나를 만나러 직접 서울까지 오는 엄마와는 오늘 어릴 때 가족이 살았던 북촌 쪽을 가보기로 했다. 3월 말이라 아직 완연한 봄이 오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낮 기온을 느낄만한 날씨였다. 봄나들이 가는 차림으로 온 엄마는 나에게 팔짱 끼며 아직 날씨가 춥다며 내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기모가 있는 트레이닝팬츠에 경량 패딩을 입고 장갑까지 낀 나는 상대적으로 칙칙했다. 특히 보풀이 일어난 겨울 내내 낀 장갑, 손 마지막 마디 부분이 뚫려 있는 워머 형식의 이 장갑까지 낀 나의 옷차림은 매우 따스웠다. 그리고 안전했다.
"어른들 만날 때 그러고 어떻게 가."
타투에 대한 엄마의 불만은 명절 즈음에 커지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네 몸을 소중히 하라, 지우는 병원을 알아보라는 바람을 내비치는 정도. 명절에 집에 내려가면 친척들 보기 창피하므로 최소 노쇠하신 할머니 눈에는 안 띄었으면 하는 불편함을 강력 표현. 지난 설 가족 모임에서 장갑을 꼈을때 묘하게 부드러워지는 엄마의 시선에 안락함을 느껴서인지 이번엔 내가 자진해서 '장갑 차림'을 한 것이다.
장갑을 낀 동안은 외출 시 팔짱을 끼고 손을 잡거나 쓰다듬으면서도 무사히 타투 언급에서 넘어갈 수 있었으니 나도 편안했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보면 엄마에게 딸의 타투란 눈에 보였을 때 심기를 무척이나 거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 장갑을 끼면 괜찮다는 말인가? 내 타투는 그 자리에 있는데 장갑을 꼈다고 편안해지는 엄마의 마음을 어처구니없지만 이해한다. 누구의 기분도 언짢게 하지 않고 장갑으로 우리 두 사람은 안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북촌 한옥 마을 가는 길에는 우리가 자라온 동네였던 안국동이 있다. 지금은 카페와 소품샵 등이 가득한 거리로 볼거리가 많지만 예전 건물의 모양을 허물지 않아 정감이 그대로다. 우리는 골목을 가다가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내 친구네 집. 엄마가 더 반가워한다.
"그렇게 친했었어?"
"그럼, 너네 학교 갔을 동안 그 집 엄마랑 나랑 같이 정독 도서관 갔지. 둘 다 애 유모차 태우고 와서 애들 어떻게 키울지 얘기하고, 시댁 얘기하고... 지금도 사나 궁금하네?"
엄마는 건물 입구 우편함에 이름을 살핀다.
"꼭대기 층이었잖아."
계단까지 올라가려고? 엄마는 문 앞까지 갔다가 지금은 이사 갔겠지, 하며 내려온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이십 년 전이다. 초등학교를 다녔던 이 동네는 말 그대로 우리가 뛰어놀던 곳이었다. 안국동에서부터 화동까지 올라와 정독 도서관이 있는 큰 길가로 나오니 더 익숙한 길이다. 지금은 슈퍼가 아니라 카페가 된 맞은편 건물의 바로 옆 삼층 빌라. 마당까지 쓸 수 있는 이 빌라의 반지하에 우리 식구가 세 들어 살았다.
"여기 아직 계실 거 같아. 한번 가볼까?"
건물주에 대한 믿음인지 친구네를 둘러봤을 때와는 달리 아직도 주인아주머니가 살고 계실 거 같다고 생각한 엄마는 망설이지도 않고 문을 두드린다.
"아, 엄마 제발. 그거 실례야. 그냥 가자."
나의 마음은 초조해지고. 여러 번 문을 두드리는 엄마 때문에 제발 아무도 나오지 말기를 바란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잠옷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아주머니가 나온다.
"어머, 그대로 시네. 사모님, 저예요 여기 살던 세 딸 애기엄마."
"얼굴 보니까 나도 기억이 나네." 건강 때문에 몇 번 수술을 한 뒤로 근육이 잘 안 움직이고 말이 어눌해지셨다는 아주머니는 내 어릴 적 기억 속 실루엣을 그대로 갖고 계셨다. 엄마가 막내 동생을 병원에 데려가려고 외출했을 때도, 나와 동생, 옆집 친구가 와서 인형 놀이를 할 때도 아주머니가 있었다. 반지하였던 우리 집, 옆집과 달리 주인집은 넓고 피아노가 있고 바닥이 대리석이었다. 우리를 주인집에 불러 놀게 하던 아주머니의 원피스 차림도, 매끈매끈한 대리석 바닥인 이 집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잘 계시나 궁금해서, 저희 금방 갈 거예요"
아주머니는 "뭘 금방 가, 앉어." 하며 부엌에서 과일을 깎기 시작한다.
"빨리는 못 나가겠다, 야."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놓곤 붙잡힌 것처럼 나에게 소곤거리는 엄마의 익살에 나는 살짝 눈을 흘겼다.
"내가 막내 업고 너네 손 잡고 이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길 가다 사모님이 나를 이렇게 쳐다보더라니깐. 나 집 구하는 여자 같았나 봐."
이십 년 전 골목에서 엄마를 만난 아주머니는 엄마에게 혹시 집 구하냐고, 나 여기 집 있는데 하면서 이 건물을 가리키셨다고 한다. 이 집은 마당이 있어 엄마의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우리는 건물 반지하의 두 세대중 한 집에 살게 되었다. 옆집에도 우리 자매 또래의 아이가 있어 긴밀하게 지낸 이웃이었다.
"옆집에 젊은 애기 엄마네는 몇 년 전까지 이 동네 살았던 거 같은데. 그 집은 할머니가 괴팍했잖아. 어린 아가씨가 분식집에서 일하던 거 꼬셔서 식도 안 올리고 살았지. 자기네 애아빠는 건강하고?"
아주머니가 기억을 더듬으며 꺼내는 말들 대부분은 내가 기억 못 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야기다. 속속들이 나오는 그 시절의 사정들이 조금은 민망해 가만히 듣고만 있는 나와 30대의 엄마를 알고 있는 아주머니. 그 사이에서 이야깃거리를 꺼내는 엄마한테서 반가우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부담감을 가진 것이 느껴졌다.
"우리 애 아빠는 이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요. 옛날엔 욱하는 게 있었잖아. 이제 다 좋아졌어요. 대기만성형이에요."
"욱하는 건 이 세상남자들 다 그렇지 뭐. 안 그런 남자가 있어? 막내 키우면서 그런 자기가 대단하지. 그건 다른 사람은 못하는 거지."
그 시절 아픈 막내 동생을 포함해 세 자매를 키우며 고군분투한 엄마를 아주머니도 안쓰럽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내 성격상 그러고 살지요. 다른 사람이었음 벌써 나가 죽었지 뭐예요."
무심코 한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자조하는 엄마의 지금 말이 그런 것이었을까? 너무 진심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웃음으로 때우는 그런 거. 아주머니의 말에 해맑게 받아치는 엄마의 표정을 나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매번 이사를 했을 때나 이직을 했을 때 등. 내가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걸음으로 올라온 엄마는 달라진 것도 없는 내 모습을 보곤 한 마디씩을 하고 내려단다. 잘해놓고 사네, 같은.
"네가 안정되니까 다른 사람들을 기댈 수 있게 해 줘라."
보통 엄마라면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좀 기대라고 하지 않나? 아무튼 그 바람대로 자란 딸 같긴 하다만. 그렇게 확인을 마친 엄마는 다음을 기약하며 서울역으로 간다.
"다음번에는 평일에 올게. 퇴근은 언제 하니. 낮에 너는 바쁘잖아? 고등학교 동창들을 좀 만나려고. 나도 예전에 살던 대라 가보고 싶은데도 있고."
서울에 혼자 있는 나를 보러 온대 놓곤 관심사는 항상 엄마 내면에 있다. 궁금해서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엄마가 서울역 가는 택시 타는 걸 확인하고 나는 바로 장갑을 벗는다. 여름은 지나고 긴팔을 입을 수 있을 때 엄마가 왔으면 좋겠는데. 여름에 있는 명절은 없었겠지? 추석에 장갑 착용은 오버이려나.. 작은 걱정을 뒤로하면서 엄마의 이번 서울 방문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