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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풍 Oct 29. 2017

[인문/사회] 문자와 숫자

미래의 권력은 어디에?

일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글(文)로 하는 일, 그리고 수(數)로 하는 일. 현 교육 체계를 문과와 이과를 나눈 것도 둘 중 하나를 특화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산업화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공감대 형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 일까?


[그림 1] 사농공상, 일이 계급인 사회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선비, 농민, 장인, 상인을 지칭하는 말로 흔히 조선시대의 계급·신분제도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 말의 출처는 유교사상의 근원인 사서오경(四書三經) 중 가장 오래된 공자의 서경(書經) 한서(漢書)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본래의 의미는 “사민(四民)의 업(業)”, 그러니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뉘던 당시 양민의 '직업'을 분류한 것인데, 왜 지금에 와서는 사회 계급을 구분하는 말로 변질됐는지는 따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농공상, 사민은 나라의 초석
(士農工商四民, 國之礎)
- 관자(管子) -


하지만 여기서 내가 흥미롭게 느낀 것은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만 문자를 사용하는 일이고 나머지는 숫자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과거 소수의 선비가 글을 통해 지혜를 탐구하는 동안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숫자에 얽매여 노동을 착취당했고, 영문도 모른 체 누군가에게 지배당했다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문자는 소수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고 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림 2] 소멸된 문자들

문자는 법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고, 학문을 탐구하여 사회를 발전시키고, 시와 문학을 통해 문화를 형성하는 등 문명사회를 뒷받침하는 근간으로 오랜 시간 지켜져 왔다.. 문명의 흥망성쇠에 따라 수많은 문자가 나타나고 사라졌지만, 인류문명과 권력의 중심에 문자가 위치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편, 숫자의 사용은 토지 농작물의 조세, 특산물 공납의 할당, 또는 군대를 조직하는 기준 등으로 사용되었다. 어쩌면 과거 농업 중심의 봉건사회는 문자로 만들어 숫자로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자와 숫자의 역할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의 변화는 어떤 흐름을 타고 앞으로의 삶에 진행될까?


나는 산업 에너지·ICT 컨설팅이란 일을 한다. 뭔가 복잡하고 어려운 일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듣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업무 영역이 넓어 벌써 10년 가까이하면서도 아직 이 일의 본질을 파악하기 힘들다. 최근 정부와 산업계를 강타한 '스마트 광풍'에 힘입어 어쩌다 득을 보는 느낌이지만, 문과생이 이과생 행세를 하는 것은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다.


컨설턴트란 직업 특성상 나의 업무시간 대부분은 문자와 숫자와 씨름하며 보낸다. 어떤 일을 하면서 필요에 의해 누군가가 써놓은 문장을 분석하고 의미를 도출한다. 모든 결과에는 근거와 증명이 수반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한 수(數)를 이해하기 위한 탐사와 원하는 수(手)를 얻기 위한 탐구가 주를 이룬다. 이중, 가장 어렵고 시간을 많이 소모하는 것은 숫자를 문자로 바꾸어 소통하는 작업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어려워하는 대기업 보고 문화, 주로 자신이 한 업무를 장표(기업 PPT 보고서)로 요약 작성하는 것은, 이과와 문과가 분리된 교육 시스템을 거친 사람들에겐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다.


[그림 4] 인구론과 문송


요즘 '문송'이란 말이 있다. 이는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줄임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나타내는 단편이다. 회사에서 대부분의 업무가 ERP나 MES 등 시스템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금, 수치화되지 않은 정보와 지식은 그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다. 현 사회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것이 익숙해져 있고 때로는 누군가 나를 평가해주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까지 생길 정도로 숫자의 지배에 익숙해져 있다.


내가 하는 일에서 볼 때만 해도 인문학적 가치는 PT장표 15장 중 1장 정도에 간신히 쓰일 뿐이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Story-selling'이 되어 최종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실제 진행되는 업무와는 큰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업무는 CEO가 올바른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고, 이는 숫자와 시스템에 익숙한 이과생에게 유리할 확률이 높다. 그럼 요즘 기업이 선호하는 이과가 무엇이고, 어떤 걸 배우는 것일까? 언제까지 산업계 선호 대상으로 안정된 입지를 영위할까?


우선, 이과의 한자 이(理)를 한번 들여다보자. 천리(天理), 지리(地理), 물리(物理), 관리(管理), 이치(理致), 이유(理由) 등 무수히 많은 곳에 쓰이고 있는 이 단어는 본 뜻은 무엇일까? 영어의 Be동사(am/is/are)처럼 그 본질을 지칭하는 수식어처럼 느껴지는 이 문자는 왜 만들어진 걸까? 만든 사람의 의도는 나나 일반 대중의 견해와 어떻게 다르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 걸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쓰이는 이 단어에 호기심이 생긴다.


[그림 5] 조선 후기 문신(文臣) 김정국(金正國)의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典節要)

이(理)는 ‘다스릴 이’를 의미한다. 玉(구슬 옥)과 里(마을 리)로 구성된 이 한자는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다듬고 생각을 밝힌다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소수의 지배층이 수많은 피지배계층의 현상과 작동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관점에서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용어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다른 의도로 해석되어 계속 사용되고 있을 수 있고, 어쩌면 동서양의 관점 차이에 따라 표현의 결이 달라 발생한 걸 수도 있더?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문과(文, Literature)와 이과(理, Science)로 구분하지만, 문과의 문(文)은 근본과 원인을 찾는 학문으로 느껴지고, 이과의 이(理)는 현 상황의 답을 구하여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느껴지는 경향이 있어, 다소 앞뒤가 바뀐 느낌을 받는다. 물론,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문과생과 이과생이 졸업 당시 느끼는 감정을 빌어 해석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참고로, 실제 기업은 인재를 채용할 때 이 둘이 아닌 특정 산업에 최적화된 온순한 공대생을 선호한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의 개념은 무엇인가? 이(理)란 이치(理致), 즉 사물의 정당한 도리로써 '마땅히 해야 할 바' 라는 의미가 있다. (중략) 이(理)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임에 주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도리, 사리의 이는 본체로서의 이와는 구별해서 해석해야 한다.
- 이(理)에 대하여. 율곡사랑 홈페이지 中


문자는 인간이 진화하면서 만들어 낸 수많은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 많은 정보를 사고하기 쉽게 요약한 개념이다. 나약했던 인류가 먹고 살기 급급했던 긴 시간 속에서 생존에 유리한 군집(群集)을 이루어 살면서 발전했고, 이를 잘 다루는 것이 보다 많은 숫자의 동료를 만들 수 있었기에 인간은 이빨과 손톱이 아닌 언어를 진화시켜 지금의 문명을 이룬 것이다. 먹고 숨쉬기 위해 생긴 입을 통해 나온 소리를 사용해 생긴 소통수단이 말로 진화해 동족과 문화를 형성했고, 공간적/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어 기록하고 전달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사회는 문자를 잘 다루는 것이 상급 계층으로 올라가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림 6] 인공지능과 예술의 만남

하지만 현재 사회는 다양한 능력을 요구하고 있고, 하나의 국가를 관리하는 것보다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쟁하는 것이 중요한 상황이므로 사람들은 자국 내에만 통용되는 문자보다는, 전 세계가 공유하는, 물리적 세상만이 아닌 가상의 정보시스템 세상에서도 공식 언어로 사용되는 숫자를 익히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이러한 연유 때문에 사람들은 ‘문송하다’는 찰진 표현을 만든 것 같다.


앞으로의 미래에는 직업 대부분이 자신의 육체적 노동력을 쓰는 것보다는 신호와 데이터를 통해 기계를 움직이는 지능정보기술 중심의 사회로 나갈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숫자와 씨름하며 납땜질을 하고 있는 학생들은 앞으로 한동안 먹고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반면 외국어를 공부하고 재무제표를 읽는 법을 익히고 있는 학생들은 바늘구멍이라도 통과하지 않는 한 인공지능의 간식거리가 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3년이나 IT 업을 한 나는 항상 다루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깊게 공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글에 집착한다. 개인적 취향도 있지만, 결국 다수가 한 일을 최종 수요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은 누군가가 해야 하고, 그 역할을 위해서는 글을 통해 인간의 언어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최종 수요자가 일반 소비자던 대기업 CEO던 관계없다. 일의 결과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데이터와 수치를 바탕으로 인간의 감정 선상에서 스토리를 짜고 설득하는 방법을 누군가가 고민해야 하는데, 이것은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100% 확신할 수는 없다. 단지, 개인적으로 꼭 그러길 바랄 뿐.

 

[그림 7] 글을 쓴다는 것, 사유한다는 것


지금까지 사회는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직업과 계층을 분류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일을 하는지에 따라 이것이 정해질 수 있다. 공장 없이 스마트폰을 파는 애플이나 책 없는 출판/유통업을 하는 아마존 등 밀레니엄 새대의 새로운 강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체제와 고정관념을 와해성(Disruptive) 기술이나 접근방식으로 무너트려 일하는 방식을 바꾼 것에 공통점을 둔다. 이런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가속화될 것이고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 기술을 파는 사람 그리고 생각을 파는 사람이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의 가격은 내려가고 기술은 공유되어 가치를 잃어버린다. 또한, 현 산업계의 비용 효율과 기술 혁신을 위한 몸부림은 결국 초저가에 물건을 만들고 수많은 전문 지식과 기술을 자산화/자동화하려는 목표를 언젠가 이루어 낼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팔면 팔수록 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생각을 파는 소수만이 생산 가치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고, 이런 현상은 이미 많은 부분 다양한 산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림 7] 구글번역, 우리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것


사회 초년생 시절 모 대기업에 취직한 후 나는 미국에서 오랜 시간 거주했다는 이유로 영문 번역과 외국인 경영자 지원업무를 주로 했다. 퇴사 후에는 한동안 프리랜서 번역가로 넉넉한 돈을 받으며 편하게 일한 적도 있다. 하지만 요즘 [그림 7]에서 보듯이 예전 내가 최소 10분은 투자해야 할 일을 단 1초 만에 단돈 1원의 비용 청구도 없이 제공한다. 시간 효율의 관점으로 보면 시스템의 성능이 나보다 600배 높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실직 대상자 대부분은 최소 이 정도의 능력 격차로 인해 순식간에 시장에서 쓸려나갈 가능성이 크다. 지렁이도 밣히면 꿈틀댄다는 말은 제대로 밟힌 지렁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19세기 인간과 기계의 싸움으로 대표되는 존 핸리(John Henry)의 세기적 대결은 흑인 노예 출신의 광부가 터널공사에 첫 도입된 증기 굴착기로 인해 진행될 노동자 대량해고를 막기 위해 자신과 기계 중 누가 터널을 빨리 뚫는지를 확인하는 무모한 결투로 시작되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 그는 기계보다 빨리 터널을 뚫어 결투에는 이겼지만 승리 직후 과로로 사망했다. 기계의 활용에 대한 무지와 시대착오적 객기의 순간이었다.


영혼이 없는 기계 따위가
사람보다 일을 잘할 수는 없다
- John Henry -


이 스토리는 당시를 대표하는 전설(Legend)로 남아 전달되고 있지만,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느낌도 든다. 하지만, 현 인류가 지난 5000년간 문자를 사용하며 살아온 시간 동안 이런 방식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유대관계를 높이는 데 사용됐으며, 후손에게 지혜를 넘겨주는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과 사고방식 속에 깊게 자리 잡혀있다. 모든 전설이 인간의 의도를 반영한다는 전제하에, 이것 또한 인류의 인간다움을 말하고 싶은 사람들의 희망에서 비롯된 것 일 수 있다.


먼 훗날 이세돌이 존 핸리와 같이 이 시대의 변곡점을 대표하는 전설이 되고 나면,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인간의 무모함과 불완전함에서 오는 번뇌를 미화하여 인류의 삶 한 귀퉁이로 삼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처음 들려주는 것이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라면, 모든 것이 바뀐 세상에서도 남는 것은 인간의 유대와 소통방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다스는 누구 꺼일까?


- 2017년 10월 29일. 바쁜 한주를 앞두고 생각을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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