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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엣지정 Jul 12. 2023

번역서에 대한 소회所懷

<언어의 무게> 주인공 번역가 레이랜드의 고뇌에서 번역문학을 이해하다

*미리 쓰는 사족: 2023년 6월 27일 , 존경해 마지않는 페터비에리(파스칼메르시어)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책 한 권 정도는 더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내 마음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최근 들어 그의 글과 철학에 한없이 빠져들어 있는 내게 이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소설가를 잃은 슬픔은 실로 크다.

 전은경 번역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언어의 무게>는 인간의 본성을 비롯한 삶과 죽음에 대한 위대한 질문에 대해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와 레이랜드의 품위 있는 삶을 통해 답하고 있다. 철학서들은 모두 문항심 번역인데 2014년 10월, 초판발행된 <삶의 격>은 단연 압도적이며 이후  <자기 결정>, <자유의 기술>, <교양수업>에서도 그의 품격 높은 철학을 읽을 수 있다. 그의 별세 소식을 듣고 내게 없는 두행숙 번역의 2008년간 <레아>를 중고매장에서 어렵게 구했다.


<언어의 무게> P499/부분 각색

 문학이 숨 막히는 관용구에 대한 저항이고 문체는 이런 저항에 대한 형태라면. 이 저항과 형태를 다른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언어마다 그 음악(운율)이 다른데 또 그것은 어떻게 찾아야 하나? 낯선 목소리를 자기 목소리로 바꾸는 것. 관용구에 맞서는 문체에 상응하는 짝을 찾는 것! 이런 고뇌에 빠지면 번역자의 과제는 생각보다 막중하다.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는 번역가다.  그는 번역 중인 책의 언어 속에서 산다.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작가가 즐겨 쓰는 언어를 신도 일상에서 사용한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산만한'이란 단어를 작가의 말투인 '산재함'으로 대체한다. 번역가는 작가가 '산만함'이 아닌 '산재함'을 쓰는 이유를 작가보다 더 깊이 분석한다. 작가에게 '산만'이란 침착함의 부족이나 부주의, 경솔함이라는 단편적 뜻이라기보다 그것들을 모두 포함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 가 있는, 정신이 바깥을 돌아다니는,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산재'한다고 봤을 거라 이해한다. 또한 작가가 글을 쓸 당시 심상까지 이해하면서 정확한 음색을 찾아가며 모든 문장을 수도 없이 다시 쓰곤 한다.

 번역자가 어떤 원고를 사랑하면 나중에는 작가 자신보다 원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는 것. 이 정도가 되면 그 번역물은 원작자뿐 아니라 번역가의 언어가 되기도 하는 거다. 과연 얼마나 많은 번역가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번역의 기본은 다른 언어로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다. 원본과 100프로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같은 객관성을 찾아야 하고 음악적인 울림, 언어 간의 거리를 최대한 가깝게 사용해야 원작의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 어떤 언어로 대체하느냐에 따라 분위기도 다르고 온도도 다르며 번역할 수 없는 언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2018년 알베르카뮈의 <이방인>역한 이정서. 그는 이름난 학자의 번역본에 대해 우리가 읽은 <이방인>이 진정 카뮈의 이방인이었을까? 란 치명적인 질문을 던진다. 정해용의 <번역논쟁>이나 안정효의 <오역사전> 같은 책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면서 번역서들이 안 읽히는 이유를 내 안에서 찾기만 한 것이 억울했다.

 이정서 번역가는 알베르 카뮈의 말을 인용해서 번역문학의 현실을 고발했다.

"우리 사회는 이름난 학자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단지 출판사 사장이 오역을 지적하며 필명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번역문학의 세계에도 팽배해져 있는 권위주의를 개탄할 수밖에 없었다.  베스트셀러들도 이런데 몇 부 발행되지 않는 전문서적이나 표지와 광고만 요란한 번역서들의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안 읽혔구나. 도대체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기가 논어맹자 원서 읽기보다 힘든 책이 수두룩하다. 앞뒤 말이 전혀 안 맞기 때문이다. 번역가로서의 자질이 있는 자가 번역을 해야 한다.

 이 또한 사족이지만 이정서와 김화영<이방인> 번역본 논쟁에 장정일 작가는 논리도 없고 지성도 없는 천박한 반론을 했는지..... 내가 읽어도 부끄러운 글이 이정서 <이방인>에 첨부되어 있다. 김화영 교수가 이정서의 지적 이후에 개정판을 내었는데, 설령 그것이 이정서와 상관없다 해도 기존 번역가들의 편에 서서 한쪽에 과도하게 치우쳐 인신공격성 글을 쓴 장정일 작가는 더 우스운 꼴이 되었다.

 나도 당연히 민음사의 김화영 번역 <이방인>을 읽었다. 그런데 사실 첫 문장부터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에 이정서는 이렇게 반문한다. 첫째 '그것만으로써'는 중학생만 돼도 알 수 있는 오류다(내 표현이다).'으로서'가 지위, 신분, 자격을 나타내는 격조사인 것을. 거기다 '그것만으로써는' 뭔가? 그냥 '그것만으로는'으로 쓰면 된다. 어법도 틀렸는데 번역은 더 잘못됐다. 전보내용에서 다 나와 있는데 뜻이 없다고 번역했다. 모친이 사망했고 내일 장례식이 있다. 뜻이 없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는 의미다. 뜬금없이 '명일'은 또 왜 썼을까? 그냥 '내일'이라고 하면 될 것을. 원문과 조목조목 비교하면서 쉼표 뺀 것까지 지적한다. 이정서는 이런 범칙을 작가의 문체를 완전히 해체했다고 보고 있다.

 나는 이정서의 이 첫 소절에 대한 지적만으로도 내가 안 읽혔던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고 김화영의 번역보다 이정서의 번역을 더 신뢰하기로 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번역본은 무조건 잘 읽혀야 좋다. 잘 읽힌다는 건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소설은 사물에 대한 표현 하나로도 읽는 맛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고 문장의 힘이다. 그저 단순히 이야기만 달하는 것이라면 굳이 작가가 있을 필요가 없다. " 백번 맞는 말이다. 레이랜드처럼 작가가 글을 쓸 때의 상황과 감정까지 읽어 내려 노력하는 열정은 없다 해도 적어도 원작자와 독자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줘야 한다.

이정서는 말한다. 번역에도 엄청난 잣대를 들이대는 풍토가 정착되어야만 불필요한 중복 번역본들이 생산되어 출판문화를 후퇴시키고 독자들의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그래야만 번역 그 자체에 대한 대가와 가치도 정당하게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또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김화영 번역의 이방인(2011 초판, 36쇄 본 민음사)을 또 읽었다. 이전보다 훨씬 잘 읽혔고 오히려 김화영의 번역이 주인공의 깊은 감정이 전달되는 느낌도 들었다. 그는 작품해설에서' 알베르카뮈는 그의 철학적 에세이에서 설명하고, 소설로 묘사했으며 연극으로 생명과 운동을 부여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페터비에리 철학서를 읽은 후 그의 소설을 접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이 어려워하는 그의 소설이 쉽게 읽혔구나 인정하게 되었다. 감동이 다름은 당연했다. 내가 만약 카뮈의 철학적인 에세이들을 먼저 읽었다면 김화영 번역본으로 가독성을 문제삼진 않았을 거 같다는 말이다.

민음사 발행 김화영의 번역본. 세움출판사 발행 이정서의 번역본(2014.여기에 절반 분량이 김화영의 오역을 지적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2022년  다시 보완해서 나온 이정서 번역본
2023년 7월에 작고한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30년만에 다시 꺼내 읽다가 발견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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