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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Apr 21. 2024

알작지를 걷다

갑작스럽게 3일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집에 있어도 충분히 할 건 많았지만, 봄이 찾아왔으니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제주에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작년에 서울을 떠나 어느덧 2년 차 제주도민이 된 친구다. 갑작스러운 나의 평일 제주행에도 친구는 흔쾌히 반겨주었다.


서로 놀러 오라고만 하다가 굉장히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회포를 풀었다. 칼퇴를 하고 달려온 친구와 함께 중동 음식에 레드락 생맥주를 마시고 어여쁜 정원이 있는 카페에 가서 디카페인 커피를 마셨다. 수다는 끊이질 않았고, 서로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하면 할수록 많아졌다. 우리는 잠들기 직전까지 이야기를 쏟아냈다.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두 번째 날, 친구의 점심시간에 맞춰 함께 갈치조림을 먹고 나는 바다로 향했다. 함덕 해수욕장이 나의 목적지였다, 원래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친구네 회사 근처에서 대중교통으로 가기 편한 곳이라고 추천받았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하지만 아마도 막 버스가 떠난 뒤인 듯했다. 다음 버스를 타려면 20분을 기다려야 했다. 환승하기는 싫었다. 버스 한방으로 쭉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었다. 하지만 20분은 또 너무 지루했다. 결국, 나는 목적지를 바꿨다. 함덕에서 서우봉에 오르며 유채꽃도 보려 했고, 오래 앉아 있고 싶은 LP 카페에서 와인 한 잔 하려고 했지만,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내가 향한 곳은 알작지였다. 건너편 정류장으로 가서 바로 오는 버스를 잡아 탔다. 10km도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버스로는 50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결국 나는 내리고자 했던 목적지를 놓쳤다. 멀미가 날 것 같아 멍 때리고 있다가 놓친 것이다. 어쨌든 몇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으니, 그만큼 걸으면 될 일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원래대로였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들을 보았다. 같은 방향으로 난 바다라면 뭐 거기가 거기일 거라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았다. 바다 옆으로 난 건물들, 그곳을 지키는 식물들, 그곳에 선 나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 다르니까 절대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난 외도이동의 바다 곁을 걸었다. 아무래도 평일이다 보니 북적거리지 않아 좋았다. 나는 알작지 방향으로 걸었다. 까만 현무암이 잔뜩 펼쳐져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다는 나풀거리며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지나가고, 맛이 궁금한 식당을 지나가고, 이곳에 앉아서 보는 바다의 모습을 어떨까 싶은 테라스를 가진 카페를 지나갔다. 외도선착장의 다리를 건너 알작지로 향하다 나는 다시 내도이동으로 돌아왔다. 그 테라스 카페가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해가 날 거라고 했지만, 해는 부끄러운지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바람이 거친 게 딱 제주스러웠다. 원래 어딜 가도 날씨 요정은 아니라 화창한 것까지는 기대도 안 했다. 누구나 좋아하는 날씨보단 내가 잘 즐길 수 있는 날씨라 좋았다. 이미 에스프레소 바에서 커피를 마신 탓에 한라봉 에이드를 한 잔 시켰다. 차가운 걸 먹으며 찬 바람을 맞고 있으니 그들과 온도가 딱 맞아가고 있었다. 나는 바다 멍을 시작했다. 그보다 더 알맞은 일이 지금 과연 있을까 싶었다. 이곳을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순간이었고, 누구의 의견도 중요치 않았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잔뜩 들었다. 좋아요를 누른 수백 개의 목록에서 노래가 랜덤으로 나오는데 하필 또 지금이랑 어찌나 어울리던지, 오늘은 그냥 행복하라고 작정한 것 같았다. 20분 동안 버스를 기다리기 싫어서 바꾼 목적지인 알작지. 이곳을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싶었다. 역시 가게 될 곳은 언젠가 가게 되는 거라 생각했다. 수차례의 방문 때에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해변 이름임에도 오게 된 것도 그러하다. 어찌 됐든 나에게 꼭 맞는 타이밍이 있는 거라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즐길 수 있는 거라고.


바다 쪽으로 통창이 크게 난 대형 카페나 음식점을 지나갔다. 알작지 해변에 부족하지 않게 깔린 몽돌들을 바라보았다. 파도를 세면서, 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푹 빠져서 걸으며, 잔뜩 핀 갯무꽃과 청보리를 구경하면서 나는 이호테우 해변에 도착했다. 12년 만이었다. 그때는 초겨울이었고, 사람도 없었고, 굉장히 거친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따뜻하고 사람도 많아서 그런지 거친 느낌이 덜했다. 맨발 걷기 챌린지라도 하는 듯한 사람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신발을 신고 걸었다. 얼굴은 잊었지만 이름만 기억나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어색하면서도 친밀감은 전과 같았다.


그날 저녁 친구가 퇴근을 하고 알작지로 넘어왔다. 우리는 닭강정을 사서 알작지해변에 자리를 잡았다. 마시지 않고 가면 서운한 한라산 소주도 준비했다. 해가 서서히 하루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세상이 점점 어둠에 잠겨갔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병나발을 불다가도 파도가 몽돌에 부딪치는 소리에 집중했다. 샤르르르- 하며 파도가 뒷걸음질 치면 몽돌이 서로 비비며 소리를 냈다. 집중해야 들을 수 있는 그 소리는 희미해서 소중했고, 녹음할 수 없어서 더욱 간절히 들었다. 마음속에서 여러 번 되새길 수 있도록 여러 차례 귀를 기울였다.


알작지의 오후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알작지의 하늘을 점령한 짙은 구름과 정이 들어버린 날이었다. 아름다운 몽돌의 소리를 계속해서 음미했다. 서울 오가는 것보다 더 낫다며 마실로도 오겠다는 말을 친구에게 남기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의 목적지가 아니기에 설렐 수 있었던 알작지에서의 낭만을 잔뜩 품고 또 금방 제주를 걸을 날을 기대해 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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