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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지 May 05. 2024

유리멘탈 개복치도 출근합니다. 어떻게?

유리멘탈의 생존전략

서른이 넘어서야 나는 내 안의 독특한 방어기제를 알게 되었다.

나와 정 반대인 남편을 만나고서야 말이다.


'그 사람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

'전 회사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

'그때 너한테 무례하게 했던 거 잊었어?'


남편이 내게 종종 하는 말이다.

그렇다. 나는 종종 잊어버린다.

그것도 좋은 기억들은 남겨두고 나쁜 기억들만 속속 골라서 말이다.

남편은 이런 날 보면 신기하듯 쳐다본다. 어떻게 그런 일을 잊을 수 있을지 하고.


해리포터 속 기억을 지우기 위해 외우는 주문, 오블리비아떼.

그 주문을 외우듯 나는 내게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기억들을 잘 지운다.


처음에 이런 사실을 인지했을 때 나는 흔히 말하는 호구 같아서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내게 나쁜 기억을 준 이들에게 다시 친절하게 대했다는 것,

혹은 그들을 좋게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오히려 나의 이 마법의 주문이 회사생활을 버티게 하는 힘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호구도 회사생활 할 수 있다 편이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에게 크게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불만을 매끄럽게 이야기하지도 못하는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안으로 삭히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외우고 싶어 외운 주문도 아니고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날 공격하던 힘들고 아픈 기억들이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이내 힘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회사 동료가 아니더라도 가족 혹은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이 마법의 주문은 작동했다.

친구에게 서운했던 것 혹은 가족에게 실망했던 사실들을 잘 잊고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도 노력을 해보려고 했다.


일기로 그날의 감정을 기록해 두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일기조차 며칠 뒤에 다시 보았을 때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감정이라는 것이 내 안의 가장 무거운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가벼운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행동을 계속 이해를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이해는 감정의 중력을 없애버린다.

중력을 잃어버린 감정은 이해의 공간 속에서 떠돌다가

이내 탁! 하고 결론이 나면 그제야 다시 무게를 가진다.


3일 전에 절대 용납 못함의 카테고리에 있던 서운한 일들이

오늘이 되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 카테고리에 분류가 되곤 한다.


그래서 내 안에는 미움이라는 감정이 잘 자라지 못한다.

마법의 주문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 아니고서야 흩어지고 연해져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다람쥐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땅에 도토리를 묻어두는데

기억력이 좋지 않은 다람쥐는 땅에 묻는 도토리의 95% 이상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덕분에 땅에 묻힌 도토리는 싹을 틔우고 큰 나무로 자라게 된다.


기억력의 한계가 만들어낸 우연한 행운이라고 볼 수 도 있지만

결국 기억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많은 도토리를 땅에 묻으면서 이듬해 더 많은 도토리를 얻는다.


다람쥐는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잊어야 더 많은 도토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어쩌면 나도 잊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까?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데 어려워 그로 인해 그 감정들이 정리되지 못한 채 마음속에 방치될 바에는

그 기억들을 모조리 잊어버리기.

유리멘탈의 내가 오늘도 출근할 수 있게 해주는 나만의 생존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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