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카드를 모으는 여정
‘너 입맛이 할머니 취향이네’
무더운 여름이면 생각나는 콩국수를 먹으러 가자 했더니 친구가 건넨 말이었다.
할머니 취향이라니, 그거 꽤 나랑 어울리네.
나는 그 말이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
여름엔 콩국수 겨울엔 팥죽,
과일 에이드보다는 식혜를 더 좋아하고
커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단 달달한 라떼
매운 것보단 들깨, 들기름 같이 고소한 걸 더 좋아한다.
이렇게 보니 먹는 거에 있어서는 정말 할머니 입맛이 맞네 싶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노트에 가득 적어보았다.
입맛은 할머니지만 간식거리는 초콜릿만 챙기고 봉지과자, 사탕, 젤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음악은 늘 최신 앨범 듣기를 선호하고 SNS의 각종 밈이라는 밈은 다 섭렵.
옷은 유행의 울타리 안에서 제법 튀지 않는 스타일을 즐겨 입는다.
무채색의 옷보단 파스텔톤의 옷이나 패턴이 있는 옷이 좋고
재밌다는 게임이나 드라마, 영화, 책 등 유행하는 것들은 꼭 한 번은 보거나 해봐야 한다.
이렇게 보면 또 할머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타인이 되는 것보다 내가 되는 게 중요함을 느낀다.
무작정 동경하는 누군가를 따라 했던 20대와는 달리,
지금은 나만의 무언가를 가지는 게 더 멋져 보인달까? 그게 할머니 입맛이던 말이다.
사실 내가 내가 된다는 말은 너무 당연하지만 온전히 내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 드라마 속에 누군가 ’ 너답지 않아 ‘라고 외치고
상대방은 ’나 다운게 뭔데’라는 대사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어렵고도 철학적인 질문에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자면
나답다는 말의 의미는 나를 표현해 줄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던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나라는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하기엔 어렵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쭉 말하다 보면 그게 바로 나로 채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노트에 좋아하는 것들을 먼저 쭉 써보면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요즘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 단어로 알려주는 mbti가 유행이 되었달까.
나는 우리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보단 어쩌면 우리는 늘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게 집중해 줄 누군가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 나를 좀 들어봐'
그래서 우리는 SNS에 일상을 업데이트하고 나를 한 단어로 표현해 줄 단어들을 찾아다닌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씩 카드를 찾는 것 같다.
나를 표현해 줄 카드를 말이다.
그리고 그 카드는 나 혼자만 두고 보는게 아닌,
누군가에게 나라는 사람을 들려주기 위한 카드이다.
내가 할머니 입맛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건 마치 '오 나 카드를 하나 더 발견했어!' 이런 느낌이었으니까.
우리 각자의 카드를 잔뜩 모아두고서 하나씩 꺼내 들며 서로를 들어봐 주는 건 어떨까.
나를 표현하는 카드를 하나씩 꺼내 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건 정말 의미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