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나를 뛰어넘는다는 것.
나는 어딜 가나 '공부 잘하게 생겼다' 혹은 '야무지게 생겼다'는 얘길 곧잘 듣는다.
그리고 그런 말대로 난 범생이처럼 야무지게 살아왔고 그런 모습이 내게 꼭 편하게 맞았다.
내 comfort zone은 그렇게 만들어졌나 보다.
이 구역을 벗어나 보기로 다짐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면서부터다.
'얌전한 범생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가보자.'하는 이상한 독기가 생겼다.
나는 목표를 몇 가지 세웠다.
1. 내가 만날 낯선 이들과 편견 없이 친구 되기.
2. 미국에서 인턴십 2개 이상 하기.
3. 대책 없이 배낭여행 떠나보기.
과연 몇 개나 실행할 수 있을까. 몸집만 한 이민 가방 두 개를 싣고 공항버스에 올랐다.
자, 모든 이들과 편견 없이 친구가 되기부터 시작해야겠다.
내 룸메이트는 뉴욕에서 나고 자란 M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뉴욕 인근 뉴저지의 한 동네 출신이었지만 본인은 New York 출신이라는 말을 항상 강조했다.)
우리의 기숙사는 방을 따로 쓰되 가운데 화장실과 샤워실만 공유하는 구조였다.
이런 구조 덕분(?)에 나는 아침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올 때 M의 방에서 나오던 새로운 남학생들과 마주쳤다.
거대한 수건만 몸에 두르고 욕실에서 나오던 내가 M의 방에서 나오던 한 남학생과 눈을 처음 마주치던 날,
서로 어찌할 줄 몰라 아무 말 없이 눈을 피하고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남학생들은 거의 매번 초면이었다는 사실은 덤으로 충격적이었다.
그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나는 어느 순간 그들과 차라리 여유롭게 인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Hey."
"Hey."
몇 번 익숙해지니 언제부턴가는 ‘어 쟤 지난주에 한 번 왔던 앤데 또 왔네.’ 하며 속으로 반가워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만난 특별한 친구로는 내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던 J와 D을 빼놓을 수 없다.
학교 생활 전반부터 가끔씩 캠퍼스 주변의 맛집까지 데리고 다녀준 소중한 친구들. 내가 전 남자 친구와 헤어져 힘들어할 때도 밤에 내 기숙사까지 위로해주러 달려와 준 고마운 친구들이다.
J와 D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또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이라는 것.
이전에 한국에서 22년을 살며, 난 동성애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아니, 만나본 적은 분명 있을 것이다. 사회가 그들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아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미국에서 만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교환학생을 가기 전까지 나는 변변한 이력서 한 번 써본 적이 없다.
줄곧 과외를 해왔기 때문에 이력서가 필요 없었다. 영문 이력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에서 인턴십은 학기 중에도 활발히 진행되는 편이다. 특히나 캠퍼스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job들이 많았다. (학교마다 다를 수 있다.)
이력서부터 어떻게 써야 하나 막막해하던 찰나, 수업시간에 만난 R이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R과의 인연은 참 특이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수업 첫날 옆자리에 앉아서 널 만난 건 특별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단다.
하루에도 다섯 번씩 조별 과제를 빙자해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고, 만난 지 3일째 학관에서 점심을 함께 먹는데 surprise gift가 있다며 초대형 태극기를 건넨 친구다. 졸업 후엔 본인이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는 말과 함께.
물론 보통 미친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R은 인턴십 경력이 화려했다. 미국 주요 방송사부터 언론사까지. 본인 이름을 내건 꽤나 성공적인 유튜브 채널까지 운영 중이었다.
R은 이력서 작성부터 인터뷰까지 모든 과정을 꿰고 있었고 나의 job hunting을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의 이력서를 참고해 내 이력서를 만들고, 이메일까지 검토받아가며 나의 첫 인턴십을 구했다.
100번쯤 rejection 이메일을 받은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1시간쯤 떨어진 곳에 있는 브라질리언 재즈 가수의 1인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마케팅 인턴이었다.
거창한 회사도, 거창한 일도 아니었지만 1인 기획사이다 보니 내가 job description에 쓸 수 있는 내용은 다양했다.
무보수로 일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그보다 이력서에 미국에서 한 인턴십 경력 한 줄이 추가된다는 보람이 더 컸다.
첫 인턴십이 끝난 후 나는 두 번째 인턴십을 구하기 위해 학교 career center에 자주 드나들었고, career fair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력서가 든 파일을 들고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던 내 모습을 과거의 내가 봤다면, 너 누구냐고 물었을 것 같다.
첫 물꼬를 트니 두 번째 기회는 쉽게 찾아왔다.
내가 있던 도시에서 가장 큰 에너지 회사 산하의 비영리단체의 마케팅 인턴 자리였다.
두 회사 모두 오랫동안 우리 학교에서 인턴을 채용해왔지만 교환학생 신분의 인턴은 처음이라고 했다.
내가 처음이다.
이보다 더 듣기 좋은 칭찬은 없다고 생각했다.
배낭여행으로는 총 두 달을 계획했다.
미국 동부에서 시작해 서부, 중부, 멕시코로 넘어가는 루트였다.
특히 중부에선 내가 알고 지내던 미국인 친구의 집에 일주일 간 머무르기로 했다.
여행 경비를 최대한 아끼기 위해 에어비앤비 숙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값싼 버스 편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중부의 그 친구에게서 메시지 한 통을 받기 전까지.
안녕, 나 다음 주에 결혼해.
와 축하해, 근데 나 다음 주에 너희 집 가기로 했는데..?
Sorry but I am afraid you can't stay with us.
하늘이 노래졌다.
하필 중부의 그 도시에서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해서 스케줄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당장 일주일치 숙소를 예약하자니 너무 비쌌고, 인근 도시에서 일주일을 더 머무르자니 더욱 비쌌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그게 바로 Couch Surfing이었다.
간혹 유럽에서 배낭 여행자들이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나도 한 번 시도해볼까?
당장 몇 십만 원어치 숙소를 예약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나는 무서울 게 없었다.
재빨리 어플을 다운받아 정성스럽게 프로필을 작성했다.
안전을 위해 딱 두 가지 기준을 세워놓고 호스트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 2인 이상의 가족이 사는 집일 것.
2. 이전에 머물렀던 couch surfer들에게 긍정적인 리뷰를 받았던 호스트일 것.
생각보다 빨리 답장이 도착했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보는 세 가족의 집에서 총 일주일을 보냈다.
엄마는 내가 이렇게 '겁대가리 없는 애'였나 놀라셨다고 했다.
모두가 상상 이상으로 낯선 동양인 여행자에게 친절했지만 예쁜 3층 집에 살고 있던 가족은 더욱 특별했다.
집 지하에 직접 지은 영화관, 스파, 침실을 모두 내 마음대로 쓰라며 친절히 사용법을 알려주고, 저녁을 함께 먹다가 내게 깜짝 선물이 있다며 유명한 캐니언으로 함께 주말여행을 가자고 했다.
내가 편히 혼자 쓸 수 있도록 이미 캐니언 근처의 호텔방까지 예약해놓았다면서.
그들은 나에게 돈을 비롯한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겁대가리가 없었기에, 조건없는 친절함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배웠다.
돌이켜보면 정신 나갔다고 할 만큼 무모했던 적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응원의 말보다 '그거 안 될 거야.'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교환학생 비자로는 인턴 절대 못 구한다고 했을 때도,
대책 없이 배낭여행을 오래 떠나면 안 된다고 했을 때도,
여자 혼자 돌아다니기에 그 도시는 너무 위험하다고 했을 때도,
나는 '그냥 한 번' 해본다고 했다. 그렇게 나를 붙잡고 있던 comfort zone을 벗어나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여행 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
지금의 얼굴과 너무나도 다른 내 얼굴이 거기 있다.
빛나고, 당당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They said I can't do it, so I did it.'
라는 문장을 참 좋아한다.
comfort zone을 벗어난 이 곳에서 나는, 이 문장이 꼭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